[황진이와 허난설헌의 두 여류 문인]
1. 황진이(黃眞伊)]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시조시인으로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ꡐ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ꡑ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영초월시(初月詩)》 등이 있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의 기생이다. 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만 황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또 황진이의 출자(出自)가 황진사의 서녀라고 전해져 있지만, 그녀는 개성의 아전진(陳)가에서 기녀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는 것과 그녀의 기명이 명월(明月)인 것만은, 종실 벽계수(碧溪守)와의 수응에서 확실한 것 같다.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 원칙의 불의 속에서 태어나 관원 남성들의 노리개 거리로 존재한 해어화(解語花)인 황진이가 왜 이렇게 유명하고 신화적(神話的) 조명까지 받아왔는가?
그 원리는 간단하다. 당시, 사랑을 할 수 있는 장(場)은 기방(妓房)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정신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고 육감적(肉感的)인 것과 부합할 때, 그녀의 미모와 지성은 그런 전설을 불러일으킨 진원이 될 수 있다. 지금이야 그런 것을 초월 해서 전국민의 애인이 되었는데, 그 한몫은 황진이의 전설을 부연한 문인과 소설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같은 심정이었던지, 황진이를 에워싼 인물로 야사(野史)에 전하는 것만, 철학자 서경덕(徐敬德), 재상 송순(宋純), 황진이와 동거했다는 종실(宗室),이언방(李彦邦), 재상 소세양(蘇世讓)등이 있고, 망신한 이로 지족선사( 知足禪師)가 있고, 진이의 사적을 기록한 이로서도 허균(許筠)과 이덕형(李德炯), 유몽인(柳夢寅)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호( 白湖) 임제(林梯)는 황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치제(致祭)했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4백년 뒤, 이런 것을 많은 현대 문인들이 참여해서 다시 부연해서 황진이는 이제 기생으로서 전국민의 애인이 되었다. 황진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해어화(解語花)로 존재했겠지만, 오늘날까지 숭앙을 받고 있는 것은 그녀의 문인(文人)다운 풍모, 즉 6수의 시조와 4수의 한시(漢詩)가 있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조선 문치주의(文治主義) 전통이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
시조야 기방의 가요니까 황진이가 손쉽게 지었다 치더라도 한시는 평측(平仄)을 맞춰야 하니까, 당시로서는 일정한 교양을 쌓아야 한다. 여기에서 황진사 딸이라는 전설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황진이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고, 당시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을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더욱이 시조, "어뎌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로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졔 구태야 보내고 그리난 情(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병와가곡집>에서는 변칙적인 작법을 쓰고 있는 이 '졔구태야'의 용법 은 특기할 만하다. 그래서 몇 수 안되는 시조를 가지고 국문학사상 하나의 이정표(里程標)가 되어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황진이를 육감적인 의미의 해어화로 파악할 수는 없다. 단지 그녀의 전설을 추체험(追體驗)하고 있는 것이다.
♠황진이(黃眞伊)의 작품 세계
다정다감하면서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妓)였던 황진이는 시조를 통하여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주로 사랑에 관한 내용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갖춤으로써 관습화되어가던 시조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고 평가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을 '靑山은 내 뜻'이라고 역설적인 자기 과시로 표현하거나. 왕족인 벽계수(碧溪守)를 벽계수(碧溪水)에 견주어 유혹할 수 있는 등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다. 황진이의 시조에 이르러서야 기녀(妓女) 시조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시조 문학이 높은 수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2. 허난설헌
명문 출신의 여신동(女神童)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의 한 사람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태어났다. 그 곳은 저 유명한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태어난 자란 곳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요직에 있었으며,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바 있는 허엽(許曄)이다. 그의 장남은 성(筬), 차남은 봉, 그녀는 그 바로 밑이고, 셋째 아들 균(筠)은 그녀의 아우였다. 그녀의 이름은 초희(楚姬)라 했는데, 수재로 소문난 오빠들과 동생 사이에서 자라다가, 언제부턴가 오빠들과 동생과 함께 한학(漢學) 공부를 시작하였다. 남녀 차별이 심한 봉건제에서는 대체로 여자에게는 공부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아무도 초희에게 글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빠들 어깨 너머로 한자를 배워서 한번 익힌 것은 결코 잊지 않았고 어려운 한학 서적을 거침없이 읽어냈다. 이에 놀란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도 똑같이 한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겨우 일곱 살밖에 안된 이 소녀가 광한전(廣寒殿:선녀가 살고 있다는 상상 속의 달세계의 궁전), 백옥루(白玉樓:상상 속의 천제(天帝)가 사는 궁전)의 상량문(上樑文)을 썼다. 이 훌륭한 문장을 읽은 어른들은 크게 놀라며 여신동이 나타났다고 칭친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많은 시를 지었지만, 소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녀는 당시 최고의 한시인(漢詩人)의 한 사람이었다는 이달(李達:15611618)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열 일곱 살에 명문 양반 가문에 시집을 갔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나중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 관청에 근무하였는데, 별로 유능하지 않았는지 그리 높은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뭇사람들이 무슨 일에서나 남편을 부인의 재능과 비교하자 남편은 그녀을 매우 못살게 굴었던 것 같다.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시어머니도 며느리를 가혹하게 구박하였던 듯하다. 집안일은 적당하게 하고 언제나 책상에 매달려 책을 읽거나 시를 짓기도 하는 재원인 며느리가 고깝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강요당했던 만큼, 친정의 고상하고 지성적인 분위기와 따스하게 감싸주던 친정 식구들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친정은 차츰 불행을 겪게 되었다. 수재인 그녀의 오빠들은 과거에 합격하여 각자 요직에 올랐지만, 정적들의 시샘을 받아 자주 궁지에 몰렸다. 특히 둘째 오빠인 봉은 멀리 북방 국경 지대인 갑산(甲山)으로 유배된 적이 있었다. 여인으로 살아가면서 바늘방석 같은 시집살이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하였던 듯하다. 그녀는 고되고 쓸쓸한 생활을 수없이 썼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고독만을 한탄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세상 여인들의 여러 가지의 고충을 동정하고, 특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다는 이유로 학대받고 굶주림에 울어야 하는 사람들의 비애와 분노를 자신의 고통으로서 노래하고 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노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불합리와 신분 차별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는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국토 방위를 위한 공사에 동원된 서민들의 애국심을 노래하였다.
이와 같이 그녀는 넓은 안목으로 인생을 생각하고 겨레를 생각하고 조국의 운명을 염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세의 뛰어난 학자와 문학자들은 한결같이 "우리나라의 뛰어난 여류 시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사람은 허난설헌이다"라고 칭송하고 있다.
그녀는 생각하고 느끼고 모든 것을 마치 일과처럼 시로 쓰려고 하였다. 그렇게 쓴 시고(詩稿)는 커다란 장롱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러나 주부로서 항상 고독하였던 그녀는 1589년 겨우 스물 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염려한 대로 그 삼 년 뒤에 일본이 침략하여 국토가 황폐해졌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숨을 거두기에 앞서 그녀는 생명을 불태우듯이 써 왔던 시고를 전부 태워 버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유언대로 그녀가 죽자 그 주옥같은 시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물론 시댁 사람들이 한 일이지만, 통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녀가 친정에 남겼던 시고가 그녀의 동생인 허균에 의해서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천부적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은 그녀였지만, 그녀가 세상을 뜨고 열 일곱 해가 지난 1606년, 그녀는 우연히 일약 국제적인 존재가 되었다. 때마침 그해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과, 부사 양유년(梁有年)이 시작을 좋아하여 허균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허균이 보여준 죽은 그녀의 유고를 보고 그 훌륭한 시에 경탄하였다. 주지번은 허균에게 부탁하여 허균이 준 허난설헌의 시고를 명나라에 가져가 조선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였다. 그 시집은 명나라 도처에서 크게 환영받아 각지에서 시집의 주문이 쇄도하여 문자 그래도 낙양의 종이 값을 올렸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 중에서도 명나라의 유명한 문인 조문기(趙文奇)는 그녀가 일곱 살 때 쓴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읽고 절찬하였다. " 이 문장을 읽으니 흡사 신선이 되어 백옥루에 올라 있는 느낌이 들었다." 명나라에서 그녀의 시집이 대단한 평판을 받자 곧 조선에 역수입되었지만, 허균이 1618년 반역죄로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녀의 시집도 그대로 매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1692년이 되어서야 다시 조선에서 그녀의 시집이 출판되었다. 그것은 명나라에서 출판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서울에서 출판된 것이 아니라 동래(東來)에서 간행되었다. 무역차 부산을 왕래하던 일본의 사신과 상인들도 이 시집을 일본에 가지고 가서, 1711년 분다이야 지로베에등에 의하여 간행되어 일본에서도 널리 애독되었다. 이 시집을 명나라에서 발간한 정사(正使) 주지번은 "그녀의 시는 주옥같다"고 하였고, 부사인 양유년 역시 "이 시는 매우 아름다워 중국의 역대 시집 가운데서도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국제적인 각광을 받은 그녀의 시는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녀의 시고가 대부분 불타 버린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두 여류 문인의 차이점
황진이와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작품성이나 완성도에서 쌍벽을 이룬다. 두 시인 모두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 지만 판이하게 다른 환경과 삶의 행로를 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 세계는 독자성을 지녀 극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황진이는 남성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읊었고,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한과 설움을 토 해냈다.
허난설헌은 1563년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상감사를 지낸 허엽이 아버지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으로 유 명한 허균이 동생이다. 좋은 집안 출신인 데 비해 생애는 순탄치 않 았다. 결혼이 불행의 단초를 제공했다.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성 에 안 찼는지 바람을 자주 피웠다. 벼슬길에 나간 뒤로는 바람기가 더욱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와 불화까지 겹쳤다.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허난설헌은 뒤뜰 초당 한켠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 하며 동경해 마지 않는 생활을 글로 옮겼다.
ꡒ이윽고 돋은 달이 호수로 비쳐드니/연 캐던 조각배는 밤으로만 돌아오네/저 배야 기슭으로는 들지 마라/단잠 든 원앙이 놀라 날겠다ꡓ
남편의 외도로 서러워진 허난설헌의 마음을 그나마 달래주던 건 아 이들. 허난설헌은 강보에 싸인 그 아이들마저 하나하나 저승사자 품 에 안겨줬다. 자식 잃은 어미의 심정은 눈물조차 겉으로 드러내지 못 할 만큼 한스럽다.
ꡒ작년에 딸을 잃고/올해는 아들을 잃었네/슬프디 슬프게 땅에 묻으니/두 무덤이 마주 서 있네/백양나무 숲에서는 쓸쓸한 바람이 일고/ 소나무 숲에서는 도깨비불이 번쩍이네/지전으로 너의 혼을 불러/무덤 위에 술을 붓는다/나는 안다, 너희 남매의 혼이/밤마다 서로 같이 노 는 것을/내 비록 뱃속에 또 한 아이 있지만 어찌 가히 잘 자라기를 바라겠는가/하염없이 황대의 노래를 부르고/피눈물 흘리며 슬픈 소리 삼킨다ꡓ
불행은 허난설헌 곁을 떠나지 않았다. 친정이 당쟁에 휘말려 풍비박산 났다. 오빠 허봉은 함경북도 갑산으로, 동생 허균은 남쪽으로 귀양을 갔다. 5년 만에 귀양에서 풀렸으나 곧바로 과음과 화병이 겹쳐 폐병으로 죽어간 허봉을 귀양지로 떠나보내는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ꡒ강물은 가을되어 잔잔하고/구름은 석양에 막혔구나/서릿바람에 기 러기 울고 가니/차마차마 떠나지 못하네ꡓ
황진이는 허난설헌과 달리 남자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에게 사랑을 쏟아부은 이들은 주로 사회적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황 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나눈 사랑.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아맸다.
ꡒ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차거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 있네/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사람은 취하여 술잔 을 거듭하네/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를 닮아 차가웁고/피리 부는 코끝 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내일 아침 이별한 뒤에는/우리들의 그리움 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라ꡓ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 다.
ꡒ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도려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 서리 넣었다가/오른님 오시는 밤이거든 구비구비 펼치리라ꡓ
기다림의 극치를 노래하고 있다. 길고도 긴 겨울밤에 잠까지 설쳐가며 님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애틋하기 그지없다.
황진이는 뭇사내들을 시험하는 쪽으로 애정행각을 넓혔다. 그의 미모 와 자태, 재능에 내로라하던 사대부나 문사들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송도 근처 깊은 산속 암자에 생불이라 일컫는 거사가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지족선사(知足禪師)라 불렀다. 하지만 30년 동안 수도한 그의 법력도 황진이 앞에선 맥을 못췄다. 황진이의 유혹에 그는 결국 파계를 하고 말았다. 왕족이던 벽계수도 같은 꼴을 당했다. 송도에 와서 자신의 의젓함을 뽐내던 그는 황진이를 보고도 모른 척 스쳐 지나갔다. 황진이는 시 한 수를 읊조렸고, 벽계수는 밝은 달밤에 낭랑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ꡒ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ꡓ
황진이 말대로 벽계수는 송도에 머물며 짙은 사랑을 맛봤다. 황진이 의 자신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대 제일의 학자인 화담 서경덕 을 찾아나섰다. 화담은 황진이의 온갖 교태와 아양에 그저 웃음만 지었다. 황진이는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ꡒ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松都 三絶)의 하나이십니 다.ꡓ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ꡒ하나는 박연폭포요, 다른 하나는 접니다ꡓ라고 당당히 답했다. 그 뒤로 이들 셋은 고려 왕도였던 송악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황진이는 박연폭포를 송도 3절 중 하나로 평가할 정도로 자연에 애 착을 가졌다. 여기저기 풍광이 뛰어난 곳을 찾아다니며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박연폭포에 대한 시상은 여장부의 면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치 박연폭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 큼 묘사가 사실적이기도 하다.
ꡒ한 가닥 긴 물구비가 골짜기 틈에서 뿜어져나와/흉흉한 물결은 백 길의 용늪을 이루고/거꾸로 쏟아져내리는 샘이 구름인가 싶다/성난 폭포 비꼈으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우박과 천둥소리 마을까지 넘치고/구슬방아에서 옥이 부서져 허공에 치솟는다/구경꾼들아 말하지 마 오 여산의 승경이 좋다고/알거라 해동의 제일은 이 천마산임을ꡓ
황진이가 명사들과 사랑을 탐닉하며 자연을 노래한 데 비해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고된 삶에 눈을 돌렸다. 자신의 불행을 이타심 배양에 활용한 셈이다. 동병상련은 〈빈녀음(貧女吟)〉에 잘 드러나 있다.
ꡒ손에 가위를 잡느라/추운 밤 열 손가락이 어네/남들 위해 시집갈 옷 지으면서/해가 거듭 돌아와도 혼자만 지내네ꡓ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작중 인물은 허난설헌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ꡒ붉은 비단 너머로 등잔불 붉은데/꿈 깨보니 비단이불의 한켠이 비었네/찬서리 옥초롱엔 앵무만 속삭이고/뜰 앞에 우수수 서풍에 오동 잎 지네ꡓ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서일까. 허난설헌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뭇남성을 사랑하고 울렸던 황진이도 30대 중반에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사랑의 추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ꡒ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주야로 흐르니 옛물이 있을소냐/인걸도 물과 같아 다시 오지 아니 하더이다ꡓ
사람도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으면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인생살이를 황진이 역시 40도 채 안 된 나이에 마감했다.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가? 무엇을 해야 행복을 얻을 것인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드는 의문이다. 황진이와 허난설헌, 두 여인 의 생애와 시 세계는 이 같은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약하자면 당대 최고의 남자들을 상대로 애정행각을 벌이면서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재능을 빛낸 황진이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한 결혼생활로 고독을 씹으며 빼어난 작품을 남긴 허난설헌이나, 둘 다 역사를 빛낼 으뜸여인들로 추앙 받고 있다.
황진이가 쾌락의 대상인 기생의 전형이라면, 허난설헌은 남성들과 똑같은 주체성과 욕망을 가지고 한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최고의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황진이와 허난설헌을 비교하면서 차이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출신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살아온 인생과정도 다르다. 나는 여기서 황진이에 대하여 더 부각시키고자한다.
흔히 우리나라하면 한의 정서이다. 하지만, 허난설헌의 삶은 정말 한 그 자체이다. 남편의 외도에 시어머니와의 불화, 그리고 자식의 죽음까지. 출신은 높다해도 허난설헌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한 결혼생활로 고독을 씹으며 빼어난 작품을 남긴 허난설헌이 슬프고 애처로운 삶을 살았다면 황진이는 그야말로 일세를 풍미한 여인이었다. 우리는 황진이를 송도 3절로 기억하고 있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황진이를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3가지 뛰어난 것)으로 꼽는다. 황진이는 뭇 남성들을 사로잡으며 그녀의 뛰어난 시성을 발휘하며 바람처럼 자유롭고 허허로운 삶을 살았다. 황진이는 허난설헌보다 자유분방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으리라. 아름다운 자연 금강산과 그리고 서경덕과의 사랑이 있었기에.. 당대 최고의 남자들을 상대로 애정행각을 벌이면서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재능을 빛낸 황진이를 더 따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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