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학/수 필42 아침 지난해 연말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탄핵, 그리고 무안공항 대참사가 꼬리를 물고 터졌다. 물가에 놓은 아이처럼 우려했던 일들이 기어이 터지고야 말았다. 요즘처럼 심기가 불편하여 잠을 못 이루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또 어떤 위선과 술수가 등장할지,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불는지 참으로 점입가경이다. 주구를 시켜 도적을 가리키는 주인의 손가락을 물어뜯게 만들고, 나팔수에게 한쪽 방향으로만 나팔을 불게 한다. 마치 고장난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끌어지는 것 같이 섬뜩하다.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무법천지는 불의가 연대하여 정의를 누른다. 풍전등화에 놓인 국운이 위태한 시국에 누가 장수로 나설 것인가? 백년대계를 논하는 지장이나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덕장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나는 거미처럼 몸을 .. 2025. 1. 14. 거미 거미/ 황영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한눈파는 사이에 곧게 타오던 이랑에서 보섭이 빗나간다. 내가 몇 해 전 시골집으로 내려가 있었을 때 일이다. 해 질 무렵에 추녀의 끝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누가 쳐다보고 있어도 괘념치 않고 한땀 한땀 자로 잰 듯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거미는 여덟 개 다리와 몸이 하나처럼 움직인다. 무심한 듯 보이는 기계적인 몸놀림은 어느 한 부분도 늘어지거나 좁은 부분이 없이 간격은 일정하고 가지런했다. 집을 짓다가 힘이 부치면 잠시 쉬었다가 계속해 나갔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정갈한 수공예가 허공에서 빛난다. 내가 낡은 사진첩을 보다가 앳되고 고운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시집살이도 서툴던 새댁의 모습 같았다. 이제는 영감도 보내고 자식들 .. 2024. 12. 8. 칠게(七蟹) 칠게 (七蟹) 황영원 날 저문 개펄에는 조용한 향연이 펼쳐진다. 낙지나 고동, 짱뚱어도 많지만 대부분 칠게의 무리다. 개펄에 굴을 파고 살면서 썰물 때 밖으로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4~6월 번식기에 수컷들은 집게발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멋진 집게춤을 추면서 구애를 시작한다. 뛰어난 시각으로 위협을 느끼면 재빠르게 숨는데 훼방꾼이 사라진 어둑한 개펄의 산책은 저들만 누리는 여유와 특권일지도 모른다. 남도의 갯마을 사람들에게 칠게 사랑은 유별나서 이름만큼이나 많은 요리 비법이 전해 온다. 튀겨 먹고, 무쳐 먹고, 빻아서 비벼 먹고, 담가서 묵혀 먹고...., 그들은 '칠게' 소리만 들어도 고소한 식감과 바다의 풍미가 침샘을 자극할 것 같다. 그들에게 게의 이름을 .. 2024. 10. 1. 중력 중력황영원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면 한낮의 분분했던 그 무엇들이 조용히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비단 먼지뿐 아니라 우리의 몸도 규칙적인 긴장과 스트레스로 일몰 시각에 맞추어 조금씩 감각은 둔해지고 힘에 부친다. 몇 해 전 여름휴가 때 아내와 한라산 윗세오름 등반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 기사는 “아름다운 낙조를 보고 싶으면 가까운 모슬포항으로 모시겠다”라고 말했다. 아침에 등산화 끈을 묶으면서 하산하여 몇 군데 명소를 더 둘러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이미 무거워진 다리로 모슬포의 비경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했다. 일몰의 명소는 굳이 모슬포가 아니더라도 전망 탁 트인 곳이면 어디든 좋다. 그중에도 비가 그친 오후에 만들어내는 저녁노을은 더욱 선명하다. 이런 날 서해안 어디쯤이나 강변 어.. 2024. 4. 18. 대지의 귀 大地의 귀 황영원 닭이 울었다. 추녀를 분간키 어려울 만큼 아직 깜깜한데 이 적막을 찢는 저 까마득한 고성! 누가 저렇게 절박한 소리로 울게 하는가? 어설픈 첫울음을 시작으로 고요하던 마을이 잠시 소란스러웠다. 잠결인데도 목을 절룩거리며 질러대는 그 울대의 통증이 또렷이 전해.. 2017. 2. 1. 손/ 황영원 손(手) 황영원 골목 앞 비둘기는 내가 지나가도 옆으로 슬금슬금 피하기만 한다. 봄에 떠났다가 추워지는 늦가을부터 건물 옥상에서 털 고르기와 해바라기를 하며 가끔 돌아서서 배설물을 아래로 깔긴다. 결국, 앞집 잔반통에 대고 턴 음식 찌꺼기가 우리 안마당에 떨어지는 격이다. 또 저.. 2014. 10. 29. 불씨 한낮의 온갖 소음을 멀리하고 아슴아슴 저녁이 찾아와도 자동차의 긴 행렬과 빌딩들과 잠들지 않는 가로등 불빛은 도시의 오염된 대기를 반사하며 하늘까지 불그스름하게 만들어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시원한 구석은 없어 보인다. 늦깎이로 배운 그래픽 일을 하고부터 그런 텁텁한 하늘.. 2011. 4. 23. 흑백사진 (꼬마 닭 장사) 60년대 중반쯤 되었을까 오래된 이야기를 생각해내느라 힘들었지만 살풋살풋 열리는 추억의 그 시절로 다시 한 걸음씩 들어가 본다. 만일 밖에 있는 닭을 붙잡기라도 한다면 쫓고 쫓기며 요란 법석을 다 떨어야 겨우 한두 마리 잡히겠지만, 모이를 주는 시늉으로 빈 주먹을 펴면서 구구..... 2010. 6. 4. 線(선) 線(선) / 황영원 막냇동생 명석이가 며칠 전에 늦둥이 딸을 낳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마지막 치료를 받으러 병원으로 가는 길에 조산원에서 몸조리 하는 막내 내외와 조카를 보려고 잠시 들렀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영악하여 대부분 아이 하나를 낳고 둘째를 출산 전에 비싼 사교육비와 .. 2010. 4. 28. 수수 빗자루 수수 빗자루 / 황영원 어디가 가려운지 잠자리에 들면서 미적미적 엉덩이를 내 쪽으로 들이밀며 등을 긁어 달라고 했다. 모처럼 하는 부탁을 들어주려다 말고 잠시 멈췄다. 목덜미와 앙증스런 레이스가 물려 있는 내의 소매 밖으로 나온 팔과 하얀 허리는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목을 비.. 2010. 1. 15. 수수 빗자루 수수 빗자루 / 황영원 어디가 가려운지 잠자리에 들면서 미적미적 엉덩이를 내 쪽으로 들이밀며 등을 긁어 달라고 했다. 모처럼 하는 부탁을 들어주려다 말고 잠시 멈췄다. 목덜미와 앙증스런 레이스가 물려 있는 내의 소매 밖으로 나온 팔과 하얀 허리는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목을 비.. 2009. 10. 27. 흑백사진(어머니의 빈둥지) 어머니의 빈 둥지 황 영 원 딸그락딸그락 솥에다 가위를 삶았다.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 학교를 파하고 돌아왔을 때는 오후 두 시쯤이나 되었을까 해는 중천에 떠 있고 날은 약간 더웠다. 하복 상의 단추를 끄르며 마당을 들어서니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지 댓돌 위에 어머니의 신발이 아무렇게나 놓여 .. 2009. 9. 22. 디딜방아 디딜방아 / 황영원 대밭에 둘러싸인 상규네는 아래채 끝에 큼지막한 방앗간을 한 칸 따로 가지고 있었다. 명절 때가 되면 방앗간은 제수거리를 준비하는 이웃들로 분주하기도 했지만, 정작 주인은 남이 쉬고 있을 시간에 조근조근 작은 방아를 찧어 먹는지 이웃들이 이용할 때는 언제나 .. 2009. 9. 1. 흑백사진(첫눈) 쏴~ 하고 하얀 싸라기 눈이 창호지에 들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때는 눈이 훨훨 하늘로 올라가며 휴거를 했다. 촌 마을에 흑백텔레비전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일이다. 바람에 안테나가 돌아가면 화면에 쌀알 크기만한 무수한 점들이 흘러가며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은 옥상에 올라가서.. 2009. 6. 22. 흑백사진(고속도로) 등교할 때, 교문에 나와 계시던 학생과장님의 두발 검열에 적발되어 나와 몇 놈이 귓불을 잡은 손에 이끌려 이발기로 보기 좋게 머리 가운데다 고속도로를 내게 되었는데, 그날 수업시간 중에 선생님께서 "저기 대가리 밀린 놈! 나와서 이것 한 번 풀어봐~" 하셨다. 질문을 할 때는 보통 "오늘 며칠이냐?.. 2009. 6. 9. 흑백사진(꼬꼬재배) 육촌 분이 누나는 얼굴이 얽었다. 지금은 천연두가 자취를 감췄지만, 전에는 마마 돌림병으로 곰보가 된 사람들을 자주 만났는데 어른들은 얽은 사람은 성질머리가 있다 하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로 콩 타작마당에 넘어졌다 하기도 하였다. 얼굴이 너무 심하게 패여 매주에 콩 빼먹은 것 같은 처녀총각은 달밤에 맞선을 보면 훤한 달빛에 속아서 표가 안 난다고도 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하나둘씩 저들의 엄마 손에 이끌려 어깻죽지에 피를 흘리며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물어보니 재넘어 누구네 집에 가서 우두를 맞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무서운 행사에 잡혀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달아나며 버텨 보았지만, 결국 나와 아직 철모르는 동네 아이들 몇몇까지 모두 끌려가서 팔뚝에 따끔하게 우두를 접종하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우리 또.. 2009. 4. 28. 칼라사진(엄마놀이) 인류의 문명이나 문화가 후대까지 전해지는 과정에 대하여 많은 이론이 있겠으나, 우리는 무엇을 보고 배운다는 것과 부모를 닮은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보거나 배우지 않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아서 스스로 나오는 것과 걷는 연습도 없이 낳은지 몇 .. 2009. 2. 28. 흑백사진(담배내기) 전에는 누가 담배를 피우면 구수한 그 냄새가 좋아서 나도 모르게 윗주머니로 손이 가고, 옆에 누가 있으면 한 대 권하기도 했으니 어찌 되었건 담배인심 만큼은 무공해였었다. 그러나 전에 하루 두세 갑씩 피워오던 그 사랑스런 담배와 이별을 한 후로 이제는 누가 옆에서 담배를 피워대면 그 냄새도 .. 2009. 2. 16. 흑백사진(작은 즐거움) 원 게시물을 보시면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사무실에서 여사원들이 모여서 뽁뽁이(공기방울 포장지)를 재미삼아 톡.톡.톡... 트뜨리고 있었다. 김홍도의 풍속화 고급포장이나 유리제품의 완충재로 좋아 이삿짐센타나 사무실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편인데 우리 사무실도 CD를 오토바이 퀵 써.. 2009. 2. 12. 흑백사진(진신사리) 허리가 뒤엉키는 무거운 걸음이지만 어머니는 머리에다 조그만 나무 동치를 받쳐 이고 허리에는 나물보자기 하나를 불룩하게 차고 골목을 들어서는데, 그날은 이웃에 품앗이 모내기를 나가셨던 날이다. 어머니께서 해가 빠져 어둑어둑할 무렵이 다 돼서야 들어오셨는데 다른 날 보다 많이 늦으셨다. .. 2008. 10. 1. 흑백사진(아버지 냄새) 6·25 전쟁이 끝나고 십여 년 정도 지난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파르르 소리를 내며 바늘 같은 솔잎이 타는 소리가 조용히 들리는 부엌에는 무쇠솥이 걸린 까만 아궁이 앞에 어머니가 마른 솔가리를 조금씩 던져 넣으며 큰 솥에 노란 좁쌀 한 홉에 쌀 한 움큼을 그 위에 얹고 금쪽같.. 2008. 8. 29. 흑백사진(운동회) 학교 체육선생님이 하얀 유니폼에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다니기 시작하면 선생님의 흰옷과 운동장에 시원하게 그어진 횟가루 선들 때문에 하늘은 더욱 눈부시고 푸른것 같았다. 국민학교 운동장은 조회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방 미루나무 위에다 만국기를 늘여 묶어 부채살 같이 하늘을 덮었고, 조.. 2008. 8. 5. 흑백사진(동거) 내가 기억 해 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 그야말로 머릿털 나고 첫 사건을 위하여, 꿈 반 기억 반의 희미한 추억속 뉴런의 밑바닥을 지금 나는 어릴 때 젖먹던 힘까지 들여가며 살펴 보려 한다. 아마 첫 돌쯤 지나고 둥글게 생긴 나무상 다리를 잡아 당기고 걸음을 막 떼기 시작 할 무렵이거나 아니면 약.. 2008. 8. 1. 흑백사진(보물상자) 내 나이 여섯살 무렵. 안방 벽에는 꽃이나 과일 또는 닭을 예쁘게 수놓고 풀먹여 다듬질한 하얀 무명 횟대보가 한쪽 벽을 불룩하게 채우고있었는데, 아이들과 숨바꼭질 할 때나 그냥 심심할 때 그 안에서 숨거나 혼자 가만히 놀아서 포근한 그 속을 너무나 잘 안다. 아버지의 외출복과 어머니와 할머니.. 2008. 7. 9. 흑백사진(제비뽑기) 보릿대가 누르스름하게 퇴색되어 갈무렵 후끈한 바람이 밭고랑에서 뭉쳐 오르는 점심나절은 밖에 섯기만 해도 땀이 등골을 흘러 내렸고 볕은 따가워 어른들은 하나 같이 필름테 맥꼬자를 쓰고 다녔으나 얼굴 까므잡잡하긴 매한가지였다. 한더위를 빗겨 지나면 아이들은 하나 둘씩 모이며 예닐곱 마.. 2008. 6. 25. 늙음과 기쁨 늙음.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미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 2008. 5. 11. 흑백사진(잔혹사) 잔혹사 아침 일찍 일어나 무슨 큰일이나 치를 것 같이 서둘러 큰 솥에다 물을 펄펄 끓였다. 돼지나 닭을 잡으려는 것도 아닌데 약간은 서두르고 조금은 상기된 모습이다. 오래전, 지금부터 반세기 전 6.25사변 중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이 세상에 나기 몇 해 전 일이므로 .. 2008. 4. 15. 흑백사진(개살구) 마당 가에 개살구가 노랗게 익을 즈음이면 모내기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넓은 벼 포기 사이로 황색 논바닥이 맑게 들여다 보였다. 물속은 작은 물벌레들의 천국이고 난 하늘이 비치는 논둑길에 앉아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살구는 마당과 토담 위에 떨어졌고 논으로도 떨어졌다. 할머니는 고.. 2008. 1. 25. 흑백사진(황새야 덕새야) 황새야 덕새야 아가리 딱딱 벌려라 열무김치 드간다. 황새야 덕새야 니 모간지 기나 내 모간지 길다. 할머니께서 사랑스런 손주를 안고 밥을 떠먹이며 부르셨다는 노래인데 어머니께서 가끔 그 노래를 들려 주시곤 하셨습니다. 동양의 황새는 서양의 펠리컨(Pelican) 정도의 사랑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2007. 11. 28. 흑백사진(청보리) 저만치 하얀 돗단배가 햇살 반짝이는 물결위에 가만히 떠 있다. 청 보릿대 일렁이는 물결 너머로 바다는 거기 있었고 나는 혼자서도 잘 논다. 간장색 오줌통에 빠진 파리 붉은 황토 흙과 땅강아지가 내 친구였던 때 한참을 놀다 다시보면 흰 돗단배는 몇 뼘을 지나 있었다. 부싯돌로 담배불 붙이며 다.. 2007. 10. 20.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