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학227 거미 거미/ 황영원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한눈파는 사이에 곧게 타오던 이랑에서 보섭이 빗나간다. 내가 몇 해 전 시골집으로 내려가 있었을 때 일이다. 해 질 무렵에 추녀의 끝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누가 쳐다보고 있어도 괘념치 않고 한땀 한땀 자로 잰 듯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거미는 여덟 개 다리와 몸이 하나처럼 움직였다. 무심한 듯 보이는 기계적인 몸놀림은 어느 한 부분도 늘어지거나 좁은 부분이 없이 일정하고 가지런했다. 힘에 부치면 잠시 쉬었다가 계속했다. 마침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정갈한 수공예가 허공에 걸렸다.내가 낡은 사진첩을 보다가 앳되고 고운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시집살이도 서툴던 새댁의 모습이다. 이제는 영감도 보내고 자식들 여의고 혼자 집을 지키시는 어머니를 .. 2025. 1. 25. 아침 지난해 연말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탄핵, 그리고 무안공항 대참사가 꼬리를 물고 터졌다. 물가에 놓은 아이처럼 우려했던 일들이 기어이 터지고야 말았다. 요즘처럼 심기가 불편하여 잠을 못 이루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또 어떤 위선과 술수가 등장할지,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불는지 참으로 점입가경이다. 주구를 시켜 도적을 가리키는 주인의 손가락을 물어뜯게 만들고, 나팔수에게 한쪽 방향으로만 나팔을 불게 한다. 마치 고장난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끌어지는 것 같이 섬뜩하다.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무법천지는 불의가 연대하여 정의를 누른다. 풍전등화에 놓인 국운이 위태한 시국에 누가 장수로 나설 것인가? 백년대계를 논하는 지장이나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덕장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나는 거미처럼 몸을 .. 2025. 1. 14. 거미 거미/ 황영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한눈파는 사이에 곧게 타오던 이랑에서 보섭이 빗나간다. 내가 몇 해 전 시골집으로 내려가 있었을 때 일이다. 해 질 무렵에 추녀의 끝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누가 쳐다보고 있어도 괘념치 않고 한땀 한땀 자로 잰 듯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거미는 여덟 개 다리와 몸이 하나처럼 움직인다. 무심한 듯 보이는 기계적인 몸놀림은 어느 한 부분도 늘어지거나 좁은 부분이 없이 간격은 일정하고 가지런했다. 집을 짓다가 힘이 부치면 잠시 쉬었다가 계속해 나갔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정갈한 수공예가 허공에서 빛난다. 내가 낡은 사진첩을 보다가 앳되고 고운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시집살이도 서툴던 새댁의 모습 같았다. 이제는 영감도 보내고 자식들 .. 2024. 12. 8. 칠게(七蟹) 칠게 (七蟹) 황영원 날 저문 개펄에는 조용한 향연이 펼쳐진다. 낙지나 고동, 짱뚱어도 많지만 대부분 칠게의 무리다. 개펄에 굴을 파고 살면서 썰물 때 밖으로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4~6월 번식기에 수컷들은 집게발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멋진 집게춤을 추면서 구애를 시작한다. 뛰어난 시각으로 위협을 느끼면 재빠르게 숨는데 훼방꾼이 사라진 어둑한 개펄의 산책은 저들만 누리는 여유와 특권일지도 모른다. 남도의 갯마을 사람들에게 칠게 사랑은 유별나서 이름만큼이나 많은 요리 비법이 전해 온다. 튀겨 먹고, 무쳐 먹고, 빻아서 비벼 먹고, 담가서 묵혀 먹고...., 그들은 '칠게' 소리만 들어도 고소한 식감과 바다의 풍미가 침샘을 자극할 것 같다. 그들에게 게의 이름을 .. 2024. 10. 1. 칠게 칠게 산해경 손을 높이 들고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바다가 밀려왔다 진창에 빠져가슴 치며 애통할 때바다가 밀려왔다 안으로만 굽는 집게발로감사할 때도바다가 밀려왔다 ------------------------------------------------------주는 언제나그 나라와 의를 생각하사오른손을 펴신다 2024. 9. 8. 중력 중력황영원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면 한낮의 분분했던 그 무엇들이 조용히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비단 먼지뿐 아니라 우리의 몸도 규칙적인 긴장과 스트레스로 일몰 시각에 맞추어 조금씩 감각은 둔해지고 힘에 부친다. 몇 해 전 여름휴가 때 아내와 한라산 윗세오름 등반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 기사는 “아름다운 낙조를 보고 싶으면 가까운 모슬포항으로 모시겠다”라고 말했다. 아침에 등산화 끈을 묶으면서 하산하여 몇 군데 명소를 더 둘러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이미 무거워진 다리로 모슬포의 비경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했다. 일몰의 명소는 굳이 모슬포가 아니더라도 전망 탁 트인 곳이면 어디든 좋다. 그중에도 비가 그친 오후에 만들어내는 저녁노을은 더욱 선명하다. 이런 날 서해안 어디쯤이나 강변 어.. 2024. 4. 18. 빛과 그림자 골목길을 돌아서자, 그는 나보다 먼저 저만치 앞서 휘청거리며 서 있고, 등 뒤로 명랑한 살굿빛 해가 내 어깨에 볼을 비비며 따라왔다. 나는 페스트푸드점 한쪽 탁자에 앉아 빵과 몇 모금의 우유로 간밤의 피곤과 허기를 달랬다. 이렇게라도 아침 공기를 마시며 자유로이 다닐 수 있음을 감사했다. 면회 시간에 맞추어 병동으로 돌아왔을 땐 대기실의 보호자들은 이미 복도에 나와 있었다. 모두 초조하게 벽시계를 보거나 출입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창문 너머로 미동도 없는 환자의 침대 주변을 의료진들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뇌혈관 질환의 사망률은 암, 심장질환, 코로나, 폐렴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뇌혈관 질환은 젊은 20대부터 발생하고 진행되기 때문에 젊을 때부터 좋은 생활 습.. 2024. 2. 27. 없다 없다 산해경 통증이 없는 예술에는눈물이 없다 2024. 1. 25. 십자가의 축도 십자가의 축도 주 달려 돌아가신 그 십자가 지울 수 없는 은혜가 나의 마지막 그 순간까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나를 기다리고 서 있다 2023. 12. 31. 눈과 떡 내리는 흰 눈이 떡가루가 아니라서 좋다만나가 아니라서 좋다육에 속하지 않아냄새 나지 않는다 눈은추한 몸덮어주며어깨를 다독인다흔적 없이 사라져도생명수로 거듭난다 2023. 12. 31. 퇴고의 계절 퇴고의 계절 산해경 나목 아래 서늘한 바람 잊히던 것이 밟힌다 생멸의 통증 가운데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2023. 11. 14. 큰 그림 큰 그림 여기에 사진첩이 있고 그 속에는 그림이 있습니다. 나라와 자연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은 무엇일까요? 그가 민족의 뿌리를 찾아 몽골 초원과 바이칼 호수 등을 누비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본질적 접근으로 얻어진 해법은 바로 이것! 동아지도 안동립 대표는 세계전도를 뒤집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시아의 동쪽 끝에 붙어있는 실뿌리 같던 나라가 학이 날개를 편 기세로 태평양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좌절의 역사에서 이제는 활짝 떨치고 나가는 비전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닻이 돛으로 바뀌고, 안이 거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생각해야 합니다. 꽃의 암술과 같은 반도에서 해양과 대륙은 자양분이며 열매입니다. 승패는 힘이 아니라 지혜에 달려있습.. 2023. 9. 5. 몸시 몸시 산해경 시집 안 내? 누가 물으면 나는 몸으로 쓰지 말한다 2023. 8. 26. 요상헌 문 요상헌 문 산해경 웃고 계신 장모님은 올해 팔순 허구도 여섯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을 들고 들어 오셔서 거실 서랍장에 고이 넣으시며 "요상헌 문이여! 저그서 넣으면 요리로 나온당게..." 모인 자식들과 여상히 드시다가 느닷없이 서랍장 신발을 꺼내시며 "야이! 시방 가야 혀!" 할머니* 또 오셨능갑따 하루에도 몇 번씩 판이 튄다 * 치매로 인한 인지 부조화 2023. 3. 23. 빛의 소리 빛의 소리 황영원 하늘과 땅의 경계뿐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물조차 식별할 수 없는 참담함, 달도 별도 없는 그믐의 밤하늘은 먹에 가깝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와 별 몇 개 박혀있는 밤하늘은 보석처럼 더 깊고 푸르다. 딥불루(Deep Blue)는 한색(寒色) 계열로 차분하고 냉정함을 지닌 이지적인 색이다. 나는 도회지의 희뿌연 삶에서 고흐의 같은 청량한 밤을 꿈꾼다. 지난해 초여름 1박 2일 모임이 울산에서 있었다. 낮에 태화강 십리대숲을 둘러보고 저녁 무렵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아늑한 교회 수련원에 도착했다. 목사님은 일찌감치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해놓고 계셨다. 저녁을 겸한 행사를 마치고 일행은 정갈하게 마련된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자정 넘어 소등하며 우연히 바라본 정원은 실루엣만 어렴풋이 남기고 정.. 2023. 2. 26. 니체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산다 2022. 10. 18. 만월 만월(滿月) 山海鏡 활짝 웃는 날만 있는 게 아니다 하루에도 조금씩 차오르며 이울며 뽀얗게 영그는 것이다 말갛게 지우며 잊어주는 것이다 2022. 9. 18. 해마의 뿔 향기로운 뿔을 가진 동물이 있다면 나는 사슴을 먼저 떠올린다. 향낭은 없지만 나뭇가지처럼 갈라지며 힘차게 위로 뻗어 오르는 뿔의 기상은 호기롭다. 무엇보다 수사슴이 걸음을 잠시 멈추고 돌아보는 자태에서 고상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사슴의 뿔은 매년 4~5월 무렵 떨어져 나가고 새 뿔이 난다. 처음에는 털로 덮인 연한 피부에 싸여 있으며 속에는 혈관이 많은데 이것이 한약재로 귀하게 쓰이는 녹용이다. 녹용은 청명을 달포쯤 지나서 소만과 망종 사이에 자른다고 한다. 자연 상태로 차츰 각질화되면 사슴은 나무나 바위에 문질러서 피부를 벗겨내고 뿔을 다듬는다. 바닷속에도 뿔이 있는 물고기 해마#1가 산다. 그리스 신화의 켄타우루스는 인간의 하반신이 말인 데 반해 해마는 말의 하반신에 꼬리가 달려있고, 유니콘처럼 길.. 2022. 7. 30. 안부 안부 山海鏡 연화장 통곡의 문이 열리자 터져 나오는 방언 떠날 채비를 마친 느낌표 하나가 출발선에 섰다 화염검이 갈라놓은 그 곳으로 떠나보내며 어떤 이는 낙원을, 어떤 이는 극락을 생각하며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 아부지 불 들어가유! 2022. 5. 31. 우화 羽化 우화 羽化 山海鏡 꿈의 흔적, 아름다움에도 거짓이 있어 어제를 벗고 오늘을 산다 찾지 마라, 나는 이미 여기에 없다 2022. 1. 21. 덧칠 덧칠/ 산해경 너의 혜음 고요히 괴어들어 어제와 오늘의 행간에 꿈틀거린다 뿌리가 조금씩 길을 낸다 * 혜음 [惠音] 상대방을 높여, 그가 보낸 편지를 이르는 말 2021. 11. 5. 햇단풍 https://youtu.be/F9Ka8bDm2VQ 2021. 7. 17. 선사시대-1 https://youtu.be/TORQKSk43YE 2021. 7. 17. 비상하기 좋은 날 https://youtu.be/kTE9pECHd8A 2021. 7. 17. 파장 罷場 https://youtu.be/qrf_YQ3WSOA 2021. 7. 17. 달항아리 https://youtu.be/Nhx2zT_V4Eg 2021. 7. 17. 귀천 歸泉 https://youtu.be/AwstfTbjQdc 2021. 7. 17. 후리포(갈릴리 어부) 후리포는 내 고향 울진에 있는 후포항의 정겨운 옛 이름이다. 오랫동안 그리 불리던 터라 귀에 익어 지금도 어색하지 않다. 혹자는 후리포의 어원을 옛 지명 휘라포(輝羅浦)에서 찾으며 '비단바다'라고 말하지만, 동해의 물결은 비단보다 거칠고 때로는 난폭하다. 그러나 고깃그물을 깁는 노인들의 성성한 백발이 미풍에 흔들리면 바다는 몸을 잘게 부수며 정어리 비늘처럼 일어선다. 신비로운 바다 휘라포는 한글 창제 이전에 한자를 잠시 빌려 쓴 음차(音借)#1로 보이므로 말은 '후리포'라 부르며 글만 '휘라포'(輝羅浦) 로 적었을 법하다. 어머니 병수발을 위하여 후포에 내려갔을 때 일이다. 7번 국도를 차로 달리면 아침 해는 바다 위에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따라온다. 이 생경한 풍경이 익숙해질 무렵 벗들도 가끔 만났다... 2021. 5. 29. 종소리(흑백사진) 종소리(흑백사진)/ 황영원 손에 쥐여준 종 줄을 잡았을 때 내 몸은 한길이나 솟구쳐 올랐다. 종소리와 함께 하늘 두레박이 안아 올리는 공중부양 사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미풍에 굼실거리는 청보리밭과 그 너머 멀리 수평선에 걸린 하얀 돛단배! 나직한 해조음에 묻혀오는 교회 종소리! 내 순수에 찍힌 추억의 첫 장이다. 어머니는 앨범을 보시다가 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새댁이 때 예배당에 업고 가면 밭에서 무 뽑듯이 권사님들이 와서 쏙 뽑아 갔따꼬! 순뎅이는 울지도 않고 이 사람 팔에서 저 사람 팔로 자꾸 옮겨 가잖나? 나중에는 어디 있는지 찾아도 안 보이고 젖은 퉁퉁 불어오고, 나도 한번 안아보고 싶은데 참말로 속이 상터라..." 어느 권사님의 팔에 안겨있는 조그만 내 사진을 가리키며 회.. 2021. 3. 27. 미끄럼 산들산들 봄바람이 통시 속으로 불어드니 신천지 궁금하여 고개 살짝 내민 새싹 어진 농부가 건져 올려 밭에다 옮겨 심다 산천도 아름답고 농심 또한 여전하여 그윽한 감로수 취해 어울려서 놀다 보니 어느덧 배가 불러 해산할 날 가깝구려 매미 소리 쨍쨍한 날 농부 품에 안겨 와서 여럿이 보는 데서 쩍하고 몸을 푸니 매끄러운 수박씨는 왔던 데로 갈 테지 2020. 12. 22. 이전 1 2 3 4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