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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사랑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시인 장승기

by 山海鏡 2019. 7. 20.

생명을 사랑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시인 장승기



김광한(소설가 문학 평론가)


 장승기 시인의 시는 여늬 시인들처럼 여기저기서 좋은 어휘(語彙)를 모아다가 전시한 것 같은 현학적(衒學的)인 시어(詩語)가 하나도 없다. 지식과 학식을 남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얻어지는 작위적(作爲的)인 시의 흐름이 아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고 해득할 수 있는 내용과 평범한 시어(詩語) 속에서 번득이는 인생의 보석을 마침내 발견하고 그제야 이 시인이 무엇 때문에 이런 쉽고 간편한 시를 썼는가 눈치를 챌 수가 있다. 생명, 그것도 인간이 아닌 동물을 주제로 그 동물의 안타까운 생명의 허전함을 그려낸 조금 긴 시들, 일테면 <서울 까마귀> <휘파람을 불어요> <로드 킬> <장어를 기다리며> 등등에 나오는 생명 사랑은 특정한 종교를 벗어난 따뜻한 눈으로 생명을 바라보는 지극한 눈길이 들어 있어서 탐욕이 천지를 덮고 있는 요즘의 개인적 삶에 생각할 틈을 주는 것들이다. 내가 편안하게 잠을 자는 이 시간에 고통을 받는 이웃, 내가 맛있게 먹는 음식의 재료인 생명, 그리고 오직 나 혼자만의 만족함으로써 얻어지는 쾌감 저편에서 허덕이는 불행을 외면하는 이 시대의 냉혹한 인간성과 그 집단에 무언의 깨달음을 주는 시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는 이 시인의 시를 통해서 얻어지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이처럼 나는 듣고 깨달았고 생각했다>가 장승기 시인의 시가 갖는 전체의 흐름이다. 칠십 년을 넘게 살면서 얻어지는 것은 지식과 학식보다도 더한 동물과 식물이 모두 함께 살아가라는 조물주의 대자연의 생명 사랑의 진리를 터득함에 있지 않을까?


어느 날 까마귀가 날아왔다.
고목나무 가지에 걸린 비닐봉지처럼 날아와
내가 가출하여 처음 서울에 왔을 때처럼
오래된 아파트 옥상에 앉아 혼자 울고 있었다.
비록 고향 까마귀가 아니라 해도
강남 갔다 돌아온 제비처럼 초등학교 동창처럼 반가웠다

<서울 까마귀의 일절>


온통 시멘트 범벅으로 이뤄진 아파트 천국, 사람의 냄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능력과 노력으로 오늘을 힘들게 살아가는 대도시의 암운(暗雲), 대도시의 그늘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갖지 못한 자, 능력이 없는 자들의 또 다른 모습, 이들은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이방인들이다. 부자라는 이름 아래 오직 미각의 충족을 위해 도락을 즐기는 부류들의 탐욕에 수없이 희생되어가는 생물들, 그 생물들에도 삶은 주어지는 것이라야 형평성이 맞지만 어디 그런가? 시인은 오래된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문득 시골 벽지에서 터 잡이 하던 까마귀 한 마리를 본다. 저들의 고향에 먹을 것이 없어 도시로 왔는가? 혹은 고양이가 뜯어 먹고 버린 검은 쓰레기봉투 속에 잔여물인 음식물에 눈이 홀려서 날아왔던가? 어릴 적 까마귀를 보면 재수가 없다고 하던 그 까마귀가 오히려 반가운 것은 온통 인위적인 문명의 규율 속에 조작된 행복을 만끽하는 인간들보다 오히려 더욱 친밀해진 자연과의 교류가 더 값진 것이라는 시인의 자연 희귀의 마음이 어쩌면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에서 자연을 벗 삼아 술잔을 기울이던 마음과 흡사할 것이란 생각이다.


컹컹컹 개가 짖는다.
5층 빌딩 옥상에서 개가 짖는다.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컹컹컹 개가 짖는다.
5층 빌딩 옥상에서 개가 짖는다.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1층은 돼지갈비 2층은 교회, 3~4층은 피부과 의원
그 5층 옥상 난간에 하얀 머리를 내밀고
맨땅이 그리운 개가 짖는다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을 불어요 일절>


  땅 길바닥을 온통 아스팔트로 도배를 하고 땅은 죄다 아파트를 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 흙냄새가 나질 않고 바람들어올 자리 하나 없는 인위적인 공간에서 사람들이 마치 기계의 부속품 처럼 부껴대면서 하루를 보내는 도심의 삶은 인정이 고갈된 마음의 사막 같은 곳이다. 흙바닥에서 뒹굴고 동족들과 꼬리를 치면서 놀아야 할 개가 아파트 옥상에서 땅을 내려다본다. 땅이 그리운 것이다. 자연의 먹이가 아니라 사람들이 개를 주기 위해 만든 맛없는 동물 사료를 먹으면서 하늘을 보고 짖는 개, 그리고 마음을 통할 곳 하나 없는 시인이 빈곤한 시상(詩想)을 채우기 위해 올라온 옥상의 5층에서 개와 조우(遭遇)를 한다.

  휘파람을 부는 시인과 컹컹 짖는 개와의 만남은 분명 이족(異族)이지만 동족을 만나는 것처럼 어색하지가 않다. 고독에 인이 박인 개는 시간을 인내할 수 있지만, 시인은 누군가 말을 하고 싶고 인정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휘파람을 분다. 그 휘파람을 듣고 개가 짖는다. 마치 화답(和答)이라도 하듯, 이미 시인의 휘파람은 낭만(浪漫)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가 낳은 무서운 고독을 향한 절규에 가까운 숨찬 목마름이다.

장승기 시인은 대화가 단절된 도시에서의 외로움을 통해 봄볕처럼 따뜻하게 흐르는 인간의 냄새가 실종된 오늘의 현실을 탄(嘆)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의 행복이란 평수 넓은 아파트에서 분명히 희생물인 동물의 고기를 조리해 입맛을 다시면서 탐욕스럽게 먹는 삶이 아니라 정과 사랑이 밀물처럼 넘치는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인정으로 충만한 옛날의 잃어버린 그 무엇이란 것을 가르쳐준다.


힘없는 자에 대한 연민
장승기 시인은 그 자신의 지난날들이 증명하듯 기독교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왔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이웃들을 향해 언제나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눈을 갖고 살아왔다. 그는 자연이 그에게 주는 고마움을 배신하지 않으면서 자연 속에서 반드시 누려야 할 모든 생명체에 대해 애정의 손길을 펴고 있다. 그는 틈틈이 산과 들로 시상을 접하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보게 되는 생명의 무참한 희생이 얼마나 안타까운가에 대한 내용을 시와 글로 적었다. 그가 적은 글은 때로는 날카로운 문명의 이기에 대한 비판이 되기도 하고 시로 옮겨졌을 때는 매우 우울한 일상의 슬픔을 무감각한 많은 이들에게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던 어느 봄날
과천 터널을 빠져나와 남태령을 오르던 길이었는데
갑자기 청설모 한 마리가 내 차로 뛰어들었습니다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이 그놈은 오른쪽 뒷타이어에
아주 미미한 감촉만 남기고 목숨을 버렸습니다
차에서 내려 확인하고 싶었으나 뒤차에 쫓겨
포기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나는 곧 잊어버렸습니다

<로드 킬의 한 구절>


  문명이란 인간을 위한 것이지 동식물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문명이란 동식물에 죽음의 공포를 일으키게 하고 불이익을 주는 혐오스러운 무기에 불과하다. 삶의 궁극적인 행복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데 있거늘, 문명에 소외되는 동물과 식물들은 그들의 지킴이 없이 무방비에 노출이 되어있는 것이다. 더 잘살기 위해 숲을 파헤치고 나무를 베어버리고 숲에 살던 동물 가족들을 인간만이 살 수 있는 도시로 쫓아버린다. 산속에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던 멧돼지 가족이 숲이 베어지고 먹이가 고갈되자 인간세계로 나와 민가를 습격하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을 보고 인간들은 멧돼지를 저주한다. 그러나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해보면 그 본능만이 무기인 멧돼지가 그렇게 잘못한 것은 없는데 인간의 이기심에 희생이 된 생명체가 아닌가. 비단 멧돼지뿐만이 아니다. 고속도로변 인근 야산에 삶의 우리를 만들어 살던 동물들이 식량의 고갈로 민가로 내려오다가 도로 한복판에 죽임을 당한다. 이른바 로드킬이다.


강물 속에서 무엇인가 내 발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찌릿찌릿 감촉이 종아리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물살에 잔모래가 굴러가는 것까지 보이는
명주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강물 속에서
내 발을 쪼고 있는 놈이 어름치 새끼라는 걸 알았다

<닥터 피시의 한 구절>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인간에게 최초로 적의(敵意)를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잔인함과 모진 것에 마침내 등을 돌린 수많은 자연계의 동식물들, 인간이 나타나기만 하면 숲의 나무가 잘리고 뿌리째 걷어낸 나무를 자리지 못하게 분재(盆栽)를 만들어 난쟁이로 바꾸게 한다. 오직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다. 분재를 보면서 인간들은 방에서 숲을 보는 즐거움을 느끼지만, 더 자랄 수 없는 분재화된 나무는 오그라든 몸체를 보면서 신음을 한다. 강물 속에서 시인의 발을 쪼고 있는 어름치 새끼는 인간의 악을 느껴보지 못한 아직 순진한 놈 같다. 인간에게 신호를 보내고 화합의 손길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위(無爲)로 그친다는 것을 잘 안다. 시인은 이쯤에서 인간에게 원천의 양심, 태초에 조물주가 생명을 만들었을 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낯선 동물들이 되어버린 고라니, 삵, 너구리, 소쩍새에서부터 수달, 두꺼비까지, 아니 먼 나라 정글에서 유유자적 삶을 즐기던 이구아나까지 흙냄새가 그리워 도로 바닥을 건너다가 무지한 차바퀴에 깔려 죽은 납작한 물체로 변한 것들을 보고 어찌 인간의 존엄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논할 수가 있는가. 우연찮게 청설모를 치어 죽인  시인의 아픔 마음이 전체 시에서 절절하게 이어진다. 자연 속의 생물은 절대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징그러운 형상의 뱀도 사람을 보면 놀라서 피한다. 그런 생물들을 인간은 장난감처럼 이름을 붙여서 애완견(愛玩犬) 또는 애완동물로 갖고 놀다가 늙거나 병들거나 싫증이 나면 버린다.

  인간에게 편리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일컬어서 과학자라고 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사람을 법률가라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복리를 증진하는 역할뿐, 진정 남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는 거리가 멀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은 늘 열려있고 자신이 사랑할 또 다른 버림받은 생명이 없는가 하는 수호자의 눈길을 가져야 한다. 장승기 시인은 오랜 인생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많이 소유하고 이름을 날리고 명예를 남들보다 더 가진 것보다 얼마나 나 아닌 남을, 남의 아픔의 눈길을 쓰다듬어 주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체를 자비로운 눈길로 지켜보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생명 지킴이로 남는 것이 얼마나 삶을 윤활하게 하는가를 깨달은 몇 안 되는 시인으로 남기를 원한다.
  이번에 상재(上梓)된 그의 모든 시는 현대인들이 무심코 넘겨버린 이름 없는 생명을 되새겨 보고, 관심을 두고 그리하여 많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하잘것없는 것들도 우리들의 친구로 삼아 함께 생명의 시한까지 가져보자는 착한 마음으로 엮은 것들이다. 장승기 시인의 문운이 더욱 빛나기를 기원한다.



장승기 시인 약력

1971년 2월 성균관 대학교 졸업
중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 획득
한국 생산성 본부 편집 과장
한국 에너지 공단 홍보부장
동작 문인협회 회장
심훈 시비 건립 추진위원장
도서출판 뒤뜰 대표
계간 시사랑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