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달픔,
그 아픔의 아름다움....
김광한(소설가 문학평론가)
흔히 수필이란 글가는 대로 생각나는대로 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이다 보면 여기에는 질서정연한 철학적 진실이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작가의 마음이 진솔되게 상대에게 전달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좋은 수필이 될 수 있지 않나 생각을 한다. 수필가 황영원의 수필은 그런 면에서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달픔과 과거에 대한 회상속에서 진실로 우리가 찾고, 찾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수필을 계속해서 쓰는 참으로 다재 다능한 필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관심과 애정을 쏟았던 것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들이다. 그의 글속에는 그가 경험한 과거의 모든 장면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을 잠시 멈추게 하고 그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들어있고 그것들은 우리가 미처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선사해주고 있다. 착하고 선량하게 살았던 유년시절의 이야기 속에 작가는 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얽혔던 인과 관계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 상재된 두편의 수필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꼬꼬재배>속의 육촌누나의 이야기에는 과거 가난한 시절의 거짓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가 된다. 요즘 같으면 곰보가 있을래도 없겠지만 곰보가 됐다면 곰보 얼굴을 어떻게 하든지 성형수술로 그 흔적을 없애려 하겠지만 과거, 천연두가 만연이 되어서 한 동네에 여러명의 곰보가 생겼을 때 그 곰보 얼굴을 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능하면 그 사람들을 화제꺼리로 올리지 않았고, 웬만하면 곰보 얼굴을 한 사람의 심성이 착하다는 말로 이를 상쇄시키곤 했다. 작가의 육촌 누나 역시 곰보였다. 그런데 그 육촌 누나가 시집을 갔다.자유연애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 한번 가약을 맺으면 평생을 함께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 속에 육촌누나의 곰보 얼굴로 인한 홀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착한 매형의 배려였겠지만 자식 낳고 살아가기도 바쁜 그 시절에 얼굴로 인한 타박을 하기에는 시대가 험궂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육촌 누나의 혼례 이야기는 마치 오래전에 영화나 드라마로 보았던 맹진사댁 경사처럼 한바탕 축제로 끝나고 그 이후의 삶의 이야기는 육촌 누나 집안의 이야기로 함몰이 된다. 그 매형과의 금실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은 육촌누나의 삶의 자세가 반듯했기 때문이리라. 비록 얼굴은 얽어서 햇볕에 나가면 금방 태가 났지만 그 곰보 얼굴속에 든 예쁜 심성만큼은 그 집안의 활력소가 되어서 매형이 죽고난후에 억척 스럽게 많은 땅을 일궈서 훌륭하게 조카들을 성장 시켰다는 것은 요즘 처럼 인물로 인해 자살을 하거나 우울증에 걸려서 삶의 의욕을 잃는 시대에 한편의 동화처럼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수필로 쓴 소설처럼 그의 이야기속에는 형이상학적인 철학 이야기, 또는 현학적은 수사같은 것이 전혀 없지만 우리들에게 아련한 잃어버린 과거속에서 한줄기 금맥을 발견케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들의 삶이란 살아갈수록 얻는 것보다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다.
과거속의 그런 착한 사람들속에 우리가 구하는 것의 가치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가치를 현대인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눈앞의 물질에 대한 탐욕에 급급하다보니 지나간 과거속의 아름다움같은 것은 자연 뒷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 안에는 우리가 앞으로 구하려던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작가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속에 잔상처럼 아직도 남아있는 것들, 그 시대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얽힌 인연들, 그리고 그 시대속의 비록 값이 나가지는 않지만 소중한 물건들에 대한 추억, 그것들은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모든 가치가 아니겠는가. 육촌누나의 수줍은 얼굴과 장가드는 매형의 활짝 핀 즐거운 얼굴,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축복해주던,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 시대속에 살았던 정겨운 사람들의 모습은 작가의 마음속에 영원히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역시 수필이란 나이가 50은 넘어야만 쓸 수 있는 장르란 것이 이 수필을 통해 다시 알게 됐다면 그것 역시 독자들이 갖는 값진 수확이 아니겠는가.
제목: 꼬꼬재배
황영원(수필가)
육촌 분이 누나는 얼굴이 얽었다.지금은 천연두가 자취를 감췄지만, 전에는 마마 돌림병으로 곰보가 된 사람들을 자주 만났는데 어른들은 얽은 사람은 성질머리가 있다 하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로 콩 타작마당에 넘어졌다 하기도 하였는데, 얼굴이 너무 심하게 패여 매주에 콩 빼먹은 것 같은 처녀총각은 달밤에 맞선을 보면 깜빡 속아서 표가 안 난다고도 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하나둘씩 저들의 엄마 손에 이끌려 어깻죽지에 피를 흘리며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네들은 제 넘어 누구네 집에 가서 우두를 맞았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런 무서운 행사에 잡혀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달아나며 버텨 보았지만, 결국 나와 아직 철모르는 동네 아이들 몇몇까지 모두 끌려가서 팔뚝에 따끔하게 우두를 접종하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 또래 이후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얽은 사람은 하나도 못 본 것 같다.
상밤터를 오다가다 당숙네 큰집에 들르면 "원이 왔나?" 하시며 작은 체구의 큰엄마가 늘 다정스레 두 손을 잡아주며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주셨고, 그때마다 형과 동생들과 놀다 가라며 감이나 먹을 것을 내어 오셔서 잘 어울려 놀았었는데 열 몇 살이나 더 먹은 누나는 나를 쳐다보기나 했을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끔 마주치며 눈인사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누나가 시집을 가는 날!
집안일이라서 으레 내 일 같이 나서서 했기에 그날도 아버지와 엄마를 따라 당숙네로 일을 도와주러 가게 되었는데,
동네에서 어느 집 큰일이 있으면 막걸리 냄새와 소음으로 떠들썩하고 어른들은 마당에 쳐놓은 천막 속에 멍석이나 가마니를 깔고 국수와 술상을 받았고, 어른들 틈새로 아이들은 정지를 드나들며 저거 엄마한테서 잔치 국수 한 그릇씩 받아 비워내었다.
지금은 "신랑 부~ 출~ " 이것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큰집 마당 가운데 솔가지와 대나무를 꽂은 높은 초례상이 차려지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쪽에서는 돼지를 잡고 마당 한쪽에서는 시커먼 가마솥에다 국수를 삶으며 동네의 경사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마당 한복판을 중심으로 하객들이 빼곡히 둘러서서 신랑의 용모와 수줍은 새각시 모습을 보려고 앞사람 어깨 사이로 목을 내밀고, 키 작은 사람은 앞줄에 앉거나 담이나 툇마루에 올라가기도 하고, 병풍을 붙잡고 밀치거나 당기며 야단법석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누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며 히쭉거리고 입담 좋은 어떤 사람이 한마디 툭 던지면 모두 까르르 웃어서 부엌에서 불을 지피던 아줌마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이쪽을 바라보며 웃었고, 밖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종종걸음으로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에 가려서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볼 수 없는 나와 아이들은 어른들 바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 겨우 얼굴에 연지곤지 찍은 누나를 보았는데, 누나는 양쪽에 팔을 붙잡은 사람들에게 몸을 맡긴 체 긴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서 있고 족두리 장식과 구슬은 긴장한 누나의 이마 위에서 약간씩 떨렸고 그때마다 구슬은 햇빛에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초례상 위에는 기름기가 흐르는 수탉 한 마리가 새끼줄에 묶인 체 고개를 쳐들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고 아래는 대야에 물이 담겨져 있었는데, 싱글벙글 웃는 매형과 긴 소매로 얼굴을 가린 예쁜 누나는 서로 마주 향하여 서 있었다.
사람들은 각시가 웃어서 첫 딸을 낳을 것인지 보다 곰보 분이 누나가 화장을 하면 얼마나 예쁜지가 더욱 궁금했을 것만 같았는데, 누나는 그저 이 난처한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는 눈치였다.
행사의 마지막쯤 되었을 때,
각시와 신랑이 표주박에 술을 나누어 마셨고, 매번 각시는 양쪽에 선 여자들과 셋이서 두 번 절하는 반면 신랑은 한 번만 절하였다.
사모관대를 하고 웃음을 잘 참지 못하는 매형의 얼굴도 여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족두리에 색동저고리를 곱게 입은 누나도 여기저기서 터지는 요란스런 폭죽에다 팥과 쌀 세례를 부채로 막으면서 오색 테이프를 뒤집어쓰고 축하 행진을 하였고.
후에 나는 친구들과 색깔 고운 테이프는 돌돌 말아서 호주머니에 넣으며 누나의 혼수 중에 경대 하나를 받아 들고 가마 뒤를 따라 신랑집으로 나섰다.
얼굴은 곰보지만 그날따라 봄꽃같이 화사하게 예뻐 보이는 누나에게 마음속으로 "누부야 잘 살아라~ "했을 것만 같았다.
지금 분이 누나는 마음씨 좋은 매형과 일찍 사별하고 억척스럽게 많은 농사를 혼자 지으며 조카들을 잘 키워 내었다.
*아버지, 그 정겨운 이름,
우리가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언제나 힘있고 정의롭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로 비친다. 그것은 우리가 어린 탓도 있지만 아버지가 젊고 힘이 있고 모든 일을 해냈기 때문에 우리들이 성장해서도 아버지라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잇는 능력자로 비추곤 했다. 황영원 수필가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였다.팔촌까지 한데모여서 제사를 지내던 어린 시절, 요즘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어른들이 어른 대접을 받았을 때 제삿날은 조상에 대한 엄숙한 제례의식이라기 보다 여기저기 따로 살던 일가 어른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이윽고 가난했던 시절에 일년에 고작 몇번 먹어보지 못한 기름기있는 음식을 먹는 날이라고 생각해서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날들에 대한 추억, 시골의 대가족제도하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마치 동화처럼 펼쳐진다. 작가는 이 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지금 그 시절의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더든 자신의 이야기들을 맞추려고 한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 어렵게 살던, 그러나 힘차게 자신의 삶을 모두 가족에게 바치고 이윽고 환갑을 맞았을 때 작가는 남들의 권유로 아버지를 등에 업은채 마당을 두어바퀴 돌았을 때 아버지가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 울음의 의미이다.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내가 이제 살만하여 부모를 모셔도 될 나이가 되었는데 당신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고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고 계셨다.폐암 말기로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내가 아버지를 업고 내렸다. 어린시절 나에게 내어 주셨던 따스하고 믿음직한 육체는 어디로 가고 진액이 다 빠진 등신불이나 빈 지게처럼 딱딱하고 가벼운 아버지 때문에 그만 울컥 밀려오는 설움에 눈앞이 아득했다."
<본문 중의 일절>
작가가 울컥 밀려오는 설움에 눈앞이 아득했다고 고백한 것과 이를 읽는 독자들의 눈시울이 붉게 충혈됐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글이 호소력이 강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버지의 냄새는 작가의 아버지를 통해서 많은 아버지의 냄새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란 주제는 흔히 다룰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다. 요즘처럼 물질에 급급해서 가난을 극복하지 못한채 일가족들을 자살로 몰고가는 냉혹하고 잔인한 아버지가 아닌, 어디까지나 인간적이고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우리들의 아버지, 작가는 이런 보통 아버지를 범상치 않게 그렸다는데 수필가로서의 장점이 더 돋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우리가 성장하면서부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시절, 작고 하셨을때보다 훨씬 나이가 더 들었는데도 아무래도 아버지 보다 못한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 그것은 그만큼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면서 한 세상을 인내로서, 그 한을 참으면서 살았다는데 있는 것이다.
때로는 약한 것같았지만 강하고 나쁜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운명을 운명 그대로 받아드린 그 선량했던 부모님들 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기에 너무 영악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 그것이 황영원의 글 세계인 것이다.그의 글 속에서 일찌기 청말(淸末)의 소설가 주자청(朱自淸)의 "아버지 뒷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그가 가벼워진 아버지를 업고 마당을 두어바퀴 돌았을 때 느꼈던 아들과 아버지와의 공감대이다. 주자청의 소설 아버지의 뒷모습에서는 헤어지는 아들에게 귤한개를 사주고 싶어서 철길을 건너 귤을 사들고 다시 철길로 내려올 때 바둥거리던 아버지의 얼굴, 그 뒷모습이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측은함, 독자들은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글은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작가 황영원은 그가 태내 신자이고 크리스천으로서의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유교적인 교분, 또 하나 더 보탤 것은 군더더기가 없는 맑은 문장력이다. 그 문장력의 힘은 그가 세상을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는 마치 우연하게 설합을 뒤졌을 때 한때 잃어버렸다고 체념했던 물건들이 설합 구석에 처 박혀있을때 이를 꺼내는 반가움으로 가득차있다. 뒤늦게 문단에 등단했지만 앞으로 쓸 것이 너무 많은, 주머니속에 가득찬 글의 보화를 하나씩 꺼낼때 독자들은 그의 삶의 철학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버지 냄새
황영원(수필가)
6.25 전쟁이 끝나고 십여 년 정도 지난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파르르 소리를 내며 바늘 같은 솔잎이 타는 소리가 조용히 들리는 부엌에는 무쇠 솥이 걸린 까만 아궁이 앞에 어머니가 마른 솔가리를 조금씩 던져 넣으며 큰 솥에 노란 좁쌀 한 홉에 쌀 한 움큼을 그 위에 얹고 금쪽같은 조반을 짓고 계셨다. 나무를 대신해서 선산에서 긁어 온 솔가리는 진득함이 없이 금새 굴뚝에서 파르스름한 옅은 연기를 내며 허공으로 흩어져 나갔다.야산의 산림은 일제강점기에 학교에서 공출한 송진 채취와 벌목으로 황폐되었고 회복이 채 되기도 전에 다시 6.25 전쟁으로 산은 인민군 군복색으로 누렇게 변해 버렸는데, 가난한 살림살이에 연탄이나 석유를 쓰는 집은 별로 없었고 사람들은 땔감을 얻으려고 남아있는 마른 풀이나 나무뿌리까지 뽑아가서 그나마 남아있던 산의 몰골은 말할 수 없이 사나워졌다고 했다.
겨울 끝자락의 황량한 들판은 잔설 속에서 머리를 내민 보리와 선산 솔밭의 푸른빛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었으나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어린아이의 갈색 머리카락을 흩으며 허름한 옷 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산기슭 양지에 두터워진 봄볕으로 황토가 흘러 내리고 돌담 아래부터 파릇한 풀색이 조금씩 번져 갈 때면 양식 항아리는 벌써 딸그락 바닥 긁는 소리를 내었다.
무 구덩이 속에 팔을 한참 휘저어야 손이 닿는 무와, 헐렁한 고구마 포대와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진 원조 밀가루가 조금 있어도 어른들의 허기진 생계는 여전하지만, 손등과 소매가 까맣고 번들거리는 아이들의 빨간 볼과 초롱한 눈망울 속에는 행복이 있었다.
설날 지나 보름까지 마을의 풍물패가 지신(地神)밟기를 하러 돌아다닐 때 아이들은 날리는 연에다 편지를 보내며 소원을 빌었다.
아침 찬 바람은 북서쪽에서 바다 쪽으로 불고 하늘은 맑고 깊었는데, 얼레를 잡은 나를 흙담 밑에 세워놓고 아버지께서 저만치 연을 잡고 뒤로 물러서자 얼레는 실이 풀리며 빙글빙글 돌고 연과 아버지의 옷자락은 찬바람에 펄럭였고,
나를 공중에 펄쩍 들어 올리셨던 것처럼 연을 던지자 얼레를 돌리며 높이 솟구쳐 마치 하늘 위를 나는 물고기처럼 좌우로 길게 헤엄쳐다녔다.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시는지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차가운 맞바람에 그대로 오랫동안 서 계셨다.
상밤터는 대략 5리 정도 들어가 있는 농가로 이, 삼십 세대가 산자락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고. 하밤터는 해안선을 따라 집들이 따개비 같이 붙어 있는데 철 따라 멸치와 전어 후리에다 미역을 내는 작은 어촌이다.
우리동네는 해안선을 따라 생긴 외길 신작로 덕분에 정류장과 다방, 약국, 중고등학교가 있어서 촌사람 앞에서 약간은 우쭐한 기분도 들었지만 정작 농번기에는 들일을 나가고 어번기에는 배를 타는 우리는 두 가지 애환을 함께 맛보고 살았다.
제사가 드는 저녁 때면 빠짐없이 어르신들이 하나 둘씩 모이는데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한복 옷고름을 펄럭이며 드나드는 것을 보면
"누구네! 무슨 날이다." 하고 사람들은 쪽집게 처럼 알아 맞혔다.
댓돌 위에는 짚수세미로 때를 벗긴 흰 고무신은 콧배기에다 제각기 표시를 하여 두었고 안방과 연결된 부엌에는 재수 준비로 바빴다.고구마 감자 명태포 가자미 두부는 전으로 부치고, 어물은 조심스럽게 쪄서 목기에 담겨 상에 올려졌다.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은 자정이 넘어야 기다리던 떡 몇 조각과 음식을 한 몫씩 받아드는데 제법 사람 대접을 받는것 같았고 그나마 쌀밥을 먹어보는 날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저 학년 어느 날 큰집에 제사가 들었는데 아침부터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아버지를 따라 나섰지만 엄청난 바람에 한 걸음도 못 떼고 결국 나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머리 위로 겉옷이 폭 씌워졌었다.
뒤로 주춤거리게도 하고 밭으로 밀어 넣기도 하는 고약한 바람이 어지간히 아버지를 애먹였지만 나는 아버지의 허리를 꼭 붙잡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보릿고랑 위로 삐쭉 나온 그루터기에 고무신 스치는 소리와 옷자락이 나부끼는 소리와 힘이 부친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들렸다.
몇 분을 지났을까 조금씩 내리막을 느낄 때 쯤 고개 정상을 넘어 먼발치로 아버지는 후리포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계실 거라 짐작이 되었다.바람이 약간 누그러들어 조용해지자 따스한 온기에 아버지의 등을 긁어 주며 맡아오던 냄새가 옷 속에 차올랐다.
다시 세월이 흘러 내가 아버지 만큼 어른이 되고,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 만큼 늙어 회갑을 맞게 되었을 때 그날 나는 하객들의 권유로 아버지를 한 번 업어 드리게 되었는데 마당 두어 바퀴 돌아설 때 어깨를 털썩이며 흐느끼시던 아버지를 느꼈다. 아마 어렵게 살아온 서러운 날들이 한꺼번에 어지러운 눈앞을 스쳐 지나갔으리라.
樹欲靜而風不止하고 子欲養而親不待라 하였던가?
내가 이제 살만하여 부모를 모셔도 될 나이가 되었는데 당신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고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고 계셨다.폐암 말기로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내가 아버지를 업고 내렸다. 어린시절 나에게 내어 주셨던 따스하고 믿음직한 육체는 어디로 가고 진액이 다 빠진 등신불이나 빈 지게처럼 딱딱하고 가벼운 아버지 때문에 그만 울컥 밀려오는 설움에 눈앞이 아득했다.
며칠 전 일 때문에 하룻밤을 사무실에서 보내고 저녁에 퇴근버스를 탔을 때 내 옷에선가 몸에선지 어릴 적 아버지의 등에서 맡았던 그 냄새가 어렴풋하게 피어올랐다.오래전 바람살이 차가운 어느 겨울 아침에 내 연을 힘껏 던져 올리시며 바라셨을 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꿈에 미치지도 못했을 것 같은 어설픈 나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몸서리치며 견뎌오신 험한 세월이 지친 내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으로 화끈 번져 나간다.
눈물도 없이 맞이했던 아버지의 임종을 6년이나 지난 지금 아버지의 그리움으로 가슴 한편 울렁거림이 일고 있었다.
수필가 황영원
약력
1956년 출생
열린문학관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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