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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학/수 필

흑백사진(제비뽑기)

by 山海鏡 2008. 6. 25.

 

보릿대가 누르스름하게 퇴색되어 갈무렵 후끈한 바람이 밭고랑에서 뭉쳐 오르는 점심나절은 밖에 섯기만 해도 땀이 등골을 흘러 내렸고

볕은 따가워 어른들은 하나 같이 필름테 맥꼬자를 쓰고 다녔으나 얼굴 까므잡잡하긴 매한가지였다.

 

한더위를 빗겨 지나면 아이들은 하나 둘씩 모이며  예닐곱 마리 소를 몰고 시끌벅적 들판을 지나가는데 오늘은 큰골에 소를 먹이러 가는 중이다.

뙤기 밭을 지나고 구불구불 논둑길을 지나며 아이들은 소가 남의 농작물에 들어가 저지레를 못하게 버릇없는 놈은 회초리로 후리기도 하고, "이러이러~" 하고 달래기도 하였다. 가끔씩 소똥과 더운 육수를 피해가며 산비탈 이쪽저쪽의 풀밭을 흘끔흘끔 곁눈질로 찾아가며 그네들의 걸음에 맞추어 깜장 고무신들도 졸졸 따라간다.

소를 산으로 쳐 올리려면 억새밭도 좋고 아카시아,  찔레, 떡갈나무나 잡초가 무성한 곳도 그네들이 좋아하는것 같았는데, 고삐는 땅에 끌리지 않게 소의 목에다 잘 감아 묶어서 소가 제 고삐를 밟거나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했다.

 

누런 소들이 굼실굼실 산허리를 올라가면서 풀을 뜯기시작하면 아이들은 각기 할 일도 많아 지는데 지금부터 본 게임이 시작된다.

그냥 그늘에서 놀기만 하는것은 지겨워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져야 시간이 가기 때문이다.

"너는 멀리 다른데로 못가게 소를 지키고,

너들은 땔 나무를 줏어오고,

나머지는 또랑에 가서 가재를 잡아오고..." 역할 분담이 끝났다.

 

아이들 몇이 웅웅거리는 좁은 개울에 내려가 물을 막고 돌아가면서 고무신으로 연신 물을 퍼내며 숨이차 하늘이 빙글빙글돌 때 쯤 되면 물고기들이 아무대나 대가리를 쳐박으며 발바닥을 파고들며 간지럽힌다.

잡힌 놈은 강아지 풀에다 꿰기도 하고 고무신에 물을 담아 넣기도 하며 한참만에 물고기 두어 꿰미에다 가재도 조막손마다 가득하니 이만하면 수확이 풍성하였다.

 

이윽고 둘러 앉아서 모닥불을 지피면 연기를 피해서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밖으로 달아나는 가재를 숯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얼굴과 팔등과 손등은 까맣고 손바닥만 하얀 아이들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연기는 쌀밥 먹는 사람한테 간다고 너스레를 떨며 서로의 괴로움을 참았다.

마른 소똥이 섞인 알불 위에 빨갛게 등이 익어가는 가재를 보며 코를 벌렁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음이 보글보글 흘렀는데

 

상국이가 강아지풀을 사람 숫자에 맞추어 잘라왔다.

제비뽑기였다.

일단은 멋진 수확물들을 사람 수에 맞게 똑 같이 나누고 또, 반은 태우고 반은 노릇노릇 익은 물고기도 그렇게 나누고나서,

마지막에 제일 먹음직한 큰 놈을 그 중 한 곳에 덤으로 얹어놓고

"야! 너그 다 모여라~"

"제일 긴것 뽑는사람이 먼저 가져가기다"

 

상국이는 늘상 하는대로 강아지풀 가는 대궁이를 몇 바퀴 돌려서 아래 보이는 부분이 위에서 찾기 힘들게 잘도 만든다.

자기가 표시해서 어떤게 긴건지 저는 다 안다. 그래서 트릭을 쓰기도 하고 말로 훼방 놓으면서까지 긴걸 못잡게 우리를 방해를 했지만

끝내 긴걸 남긴게 몇번 안되는데 상국이는 어쩌면 낙찰계의 오야(계주)같기도 했다.

 

뽑기 전에 먼저 상국이의 눈치를 한 번 슬쩍 보고 손에 쥔 대궁이의 아래와 위를 가늠하면서 신중에 신중을 다해서 뽑는다.

덥고 긴장해서 코에 땀이 뽀실뽀실 나는 용식이도 끼여있다.

쓱~ 하고 뽑았다.

아차!

제일 짧다~

이거 완전히 니놈 트릭에 속았다!

 

누가 먼저는 필요없다 마음 내키는 놈이 먼저 뽑는데 순전히 복불복이다.

나는 이것보다 더 공평한게 없는 세상을 어린시절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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