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문 학/수 필

흑백사진(잔혹사)

by 山海鏡 2008. 4. 15.

잔혹사

 

아침 일찍 일어나 무슨 큰일이나 치를 것 같이 서둘러 큰 솥에다 물을 펄펄 끓였다.

돼지나 닭을 잡으려는 것도 아닌데 약간은 서두르고 조금은 상기된 모습이다.

 

오래전,

지금부터 반세기 전 6.25사변 중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이 세상에 나기 몇 해 전 일이므로 전적으로 어머니의 말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다.

 

시집을 오자 얼마 안 되어

사변이 터져서 젊은 남정네들은 모두 전쟁터로 가고 없고 잘못되면 청상과부가 될 팔자로 고부간에 단둘이서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시집온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긴긴밤 문풍지 우는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무섭고도 추운 밤을 떨면서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봄이 되자 황가네 선산에 딸린 뙈기밭을 가꾸어 여름에 보리와 옥수수를 먹었고, 가을에는 보리를 베고 조를 심어 겨울과 봄을 살았는데, 사람들은 새댁의 뒤가 걸어 그해 가을에 조 이삭은 튼실 굵고 잘돼서 오랜만에 풍년이 들었다고들 했다.

전쟁통에 피난 가서 일꾼도 없고 고부는 서숙을 베어서 몇 단씩 머리에 이고와서 추수랍시고 했었는데 제법 많았다. 멍석에다 이삭을 모아놓고 맥주병으로 자근자근 조바심하면서 알곡은 키질해서 자루에 담고 강아지풀 같은 검불과 껍질은 부엌에다 들였다.

머리에 수건을 둘렀지만, 고대 자국이 남아 있는 앞이마의 머리에는 조 껍데기가 들어가고 시어미 눈썹과 콧잔등에도 그 껍질들이 들러붙어 얼굴을 간지럽혔다. 멍석으로 몇 판을 두드려 내면서 어깻죽지도 아플 만한데 알곡을 까불어 채우는 재미가 쏠쏠하여 그 아픔을 잊었다.

병술년 흉년에는 알이 배지도 않은 청보릿대를 빻아 먹었던 생각을 떠올리면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해 지내며 살아보니 시어머니도 조금씩 정들고 다시 맞는 겨울은 전과는 달리 서방 없이도 작은 재미가 생겼다. 이웃집 마실도 다니고 같은 동네 동갑내기 새댁 친구도 생겼다. 시어미는 초가삼간에 혼자 밤을 지새우며 딸 같은 며느리를 기다렸지만, 하루는 화가 단단히 났었다. 어느 날 친구네 부엌에서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지문을 화들짝 열리고 화가 난 시어미의 손에 잡혀 집으로 끌려간 일도 있었다.

 

어느 겨울밤 멀리 포성이 이따금 들리고 잠은 가물가물 쏟아지는데 몸이 무럽고 목도 말라 물그릇을 찾다가 대자리 위를 내달리는 그림자 같은 게 있어 시어미에게 물어보았다. 아뿔싸! 며느리는 여태 몰랐던 이 사연. 혹독한 겨울밤이나 지긋지긋한 6.25동란보다 더 무섭고 겁나는 게 빈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버선을 벗으면 뽀얀 종아리에 생긴 오돌도돌한 자국들이 그놈들에게 점령당한 수난의 흔적이라 생각하니 도저히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성냥불을 긋고 이불을 확 걷어 젖혔다.

순식간에 달아나는 민첩함이여! 이보다 빠른 걸음은 처음 보았구나!

밤새 이불을 걷은 체 쪼그리고 앉아 고부간에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아침 일찍 물을 몇 동이를 길어다 큰 솥에 가득 붓고 끓이기 시작하면서 장롱, 고리짝, 책상, 목침 할 것 없이 전부 맨 봉당에다 내놓고 닭이나 돼지 잡는 것보다 더 큰 희열로 살림살이들에다 뜨거운 물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틈난 곳에 살며 빈 곳에 산다 하여 빈대라 하던가 틈마다 펄펄 끓는 물을 들이부어 참으로 그윽한 빈대 찜을 만들어 버렸는데, 이 얼마나 신 나고 고소한 일이더냐. 초가삼간 다 타도 빈대 죽어 좋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 대목에서 신나서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그 무용담을 들을 때면 열여덟 살 울 엄마와 시어미의 빈대 죽이기 놀이는 눈앞에 보듯 선하고, 6.25 그 어떤 전투보다 치열하고 장렬한 잔혹사와 혁혁한 전공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도

한 줄의 시를 써보려고 컴퓨터를 켜는 순간에 구구절절 들끓던 글들이 빈대처럼 사라진다.

어쩌면 이들을 한방에 잡아둘 수는 없을까.

'문 학 > 수 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흑백사진(동거)  (0) 2008.08.01
흑백사진(보물상자)  (0) 2008.07.09
흑백사진(제비뽑기)  (0) 2008.06.25
늙음과 기쁨  (0) 2008.05.11
흑백사진(개살구)  (0) 2008.01.25
흑백사진(황새야 덕새야)  (0) 2007.11.28
흑백사진(청보리)  (0) 2007.10.20
흑백사진(냄비 때우소)  (0) 2007.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