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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문 학/수 필

흑백사진 (꼬마 닭 장사)

by 山海鏡 2010. 6. 4.

60년대 중반쯤 되었을까 오래된 이야기를 생각해내느라 힘들었지만 살풋살풋 열리는 추억의 그 시절로 다시 한 걸음씩 들어가 본다.

 

만일 밖에 있는 닭을 붙잡기라도 한다면 쫓고 쫓기며 요란 법석을 다 떨어야 겨우 한두 마리 잡히겠지만, 모이를 주는 시늉으로 빈 주먹을 펴면서 구구... 하고 부르면 용케도 알아듣고 목을 빼고 날갯짓까지 해대며 달려오는데, 누군들 속는 줄 알면서 그렇게 앞다투어 덫으로 뛰어들까만, 그네들이나 우리나 다 먹어야 사는 약한 구석이 하나씩 있는 것 같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걀걀 소리를 내던 암탉이 그날따라 볼이 더 붉어 보이는 까닭은 내가 다음 주 미술 시간에 쓸 준비물 탓에 한배 열댓 마리 새끼 중에서 서넛이 묶여서 장으로 시집 보내는 날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인 나를 대신 보내면서 약병아리 한 마리에 십오 원씩 받고, 두 마리 사면서 깎아 달라고 하면 얼마까지 받으라며 차근차근 일러 주시며, 다른 사람이 팔려고 나온 닭 시세를 넌지시 물어보라고 하셨지만, 이미 봐 두었던 물건을 사려면 나도 생각이 따로 있었다.

 

장날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팔아서 좋고 사서 좋은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다.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기러움과 그리움을 한 보따리씩 가지고 나와서 풀어놓는 곳이며, 닷새 만에 몰아쉬는 들숨과 날숨 같은 무엇으로 술렁임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누가 장에 가면 거름을 지고라도 따라나서고 싶은 것일까.

 

한쪽은 시골 아낙이 텃밭에서 가꾼 부추며 감자며 파 같은 채소들과 산나물을 한 줌씩 내어놓고 마치 둥지를 지키는 갈매기들처럼 조금씩 떨어져 앉아 있고, 가운데 길을 두고 양쪽으로 저만치는 달구지로 실어온 옷전부터 옹기전, 팥빙수, 비릿한 어물전에 이르기까지 까만 얼굴들이 마주 보며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도 한갓진 곳에 병아리 세 마리로 자리를 잡고 그들처럼 보잘것없는 것으로 한 푼 벌어볼 요량으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친구들이 보면 학교에서 닭장사나 장돌뱅이라고 놀릴 것 같아서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는데 옆에서 느닷없이 뻥튀기가 터졌다. 그 소리에 발을 묶어놓은 닭들이 놀라서 날개를 퍼덕이며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뻥 이요! 하는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방 날리고 나서 순서가 바뀌었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의 장난기는 구경꾼들에게 쏘는 마수걸이 축포였었다. 꼬물꼬물 허리를 굽히고 옥수수 뻥튀기를 주워 먹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들이 드러낸 허리는 마당의 누렁이 같고, 두리번거리는 눈은 영락없는 닭이었다.

 

푹푹 내리쬐는 볕에 민소매 밖으로 나온 팔은 가렵고 내 매물들은 입을 벌린 채 혀를 들고 있었다. 오늘 팔려갈 신세지만 가여운 생각에 깍지를 주워다 물도 앞에 놓아 주고 먹이도 한 줌 집어 줬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시끌벅적 물건 값을 깎기도 하고 덤으로 얹어 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들이나 정작 내 빈약한 점포를 둘러보며 병아리에게 눈길을 주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땅에 납작 엎드려 있는 애들의 날갯죽지에 큰 깃털 몇 개가 삐죽이 나와서 아직 되다 만 모양새는 마치 꼬리가 반쯤 떨어져 나간 어린 개구리나, 키만 멀쑥하고 코밑에 솜털이 난 또래 아이들같이 못생겼는데 이런 놈을 누가 사갈 것 같지도 않았다. 햇병아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볏이 빨갛지도 않은 그저 손톱만큼 밀려 올라온 볼품 없는 모양새는 화장기 없는 민낯에 움트는 새싹 같았다. 그러나 조금 더 키우다 보면 맨드라미같이 붉은 볏이 홍 두건을 쓴 것 같이 살짝 옆으로 기울어진다.

 

그들이 먹는 것도 사철 다양하여 모이로 주는 겨나 잡곡 외에도 제 발로 다니며 참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파종해서 올라오는 새싹의 순을 무참히 짓밟고 다니기도 하고 눈에 띄는 대로 쪼아대고, 모아둔 것은 발로 흩으며, 금세 뒷걸음질로 큼지막한 구덩이를 파내서 흙 목욕을 즐기는 그들은 농사일에 보통 훼방꾼이 아니다. 그래서 텃밭 울타리는 탱자나무나 쥐똥나무가 촘촘히 심어졌고, 어떤 날은 할머니께서 막대기를 들고 멍석 앞에 앉아 일삼아 지키기도 하셨다.

 

한 번은 이웃집 사나운 닭이 우리 장닭의 볏을 쪼으며 물고 늘어졌을 때 나는 얼마나 분하던지 돌멩이든 막대기든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고, 어떤 날 그놈이 우리 장닭 얼룩이에게 볏을 물어뜯기며 대가리가 땅에 처박히는 날이면 왠지 기분 좋고 신나서 고소하기까지 했다. 언젠가 남의 닭인 줄 알고 낮에 실컷 두들겨 패준 놈이 저녁에 우리 집 횃대로 쏙 올라앉더라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싸움에서 이긴 장닭이 날개 치며 지르는 우렁찬 포효는 승자의 기개요, 선혈이 낭자한 검붉은 볏은 우승자의 월계관에 가히 비길 만하다. 목과 어깨에 번들거리는 윤기와 길게 휘늘어진 꼬리가 바람에 흔들릴 때 그 신비로운 모습은 철릭을 입은 장수나 곤룡포를 걸친 군주가 이보다 더 위엄이 있었을까? 그러나 그 화려한 깃털 안쪽에는 말 못할 상처와 눈물도 또한 있었을 것이다. 장닭은 먹을 게 생기면 처자식을 불러서 먼저 먹이고 저는 나중에 먹는다. 이렇게 장닭은 볏에 피가 나도록 물고 물리며 발톱을 세우고 사생결단으로 싸우는데 처자식을 거느린다는 것과 내 것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몸이 배배 꼬이고 더워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운 좋게도 친구는 하나도 지나가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저만치 옆에서 채소를 놓고 팔던 아주머니가 이거 얼마 받을 거야? 하고 물었다. 약 병아리로 영계백숙을 해 먹을 것도, 들에 풀어놓아 기르면서 매일 하나씩 계란을 얻으려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다만 멀쑥하게 생긴 나를 보고 딱해서 자기 물건 옆에 놓고 나 대신 팔아주려고 호의를 베푼 것이다.

 

남들이 나를 모르는 것 같아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고롭지도 않게 적당한 거래가 선뜻 찾아왔던 거였다.

 

*기럽다 : '모자라다.’의 방언(경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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