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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학/수 필

수수 빗자루

by 山海鏡 2010. 1. 15.

수수 빗자루 / 황영원

 

어디가 가려운지 잠자리에 들면서 미적미적 엉덩이를 내 쪽으로 들이밀며 등을 긁어 달라고 했다. 모처럼 하는 부탁을 들어주려다 말고 잠시 멈췄다. 목덜미와 앙증스런 레이스가 물려 있는 내의 소매 밖으로 나온 팔과 하얀 허리는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목을 비비고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처럼, 양지에서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침팬지들처럼 둥지 안에서 살가운 몸짓이다. 새로 시작하게 된 일 때문에도 그렇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지내다가 잃었던 아내를 만난 반가움이다.

 

신혼 때는 아내가 머리를 위로 묶었을 때 "당신은 뒷꼭지가 참 이뻐!"라고 말하면 "뒷꼭지 안 이쁜 여자도 있나?" 하며 싫은 척 톡 쏘아붙였다. 요즘도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거울 앞에 앉아 화장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옴폭 들어간 아내의 뒷목은 가늘고 여전히 귀엽다. 그렇지만, 지나간 세월 속에 청춘의 향기는 허공 속으로 흩어지고 고운 빛깔도 세월에 바랜다. 늦은 저녁 돌아앉아 화장을 지우는 아내의 힘든 어깨를 보면 마음이 짠하고 가슴 속에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것 같다.

 

이불을 덮으며 맡아오던 익숙한 체취를 느끼면서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등을 살살 긁고 있는데 여기저기 작은 돌기들은 무엇일까? 내의를 위로 걷어 올렸으나 이제는 가까운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애달픈 나이가 되었다. 사래 밭을 가는 양 천천히 긁어 내려오는데 나의 굼뜨고 허튼짓이 끝내 못마땅했던지 제 몸을 구부려 내 손끝에 맞추면서 "! 그래..., 거기를 아주 파 버려!" 하고 아내가 말했다. 뾰루지 같은 조그만 것을 아주 속 시원히 긁어 주길 원했다.

 

아내는 늘 그렇게 확실한 것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나는 반대로 소심한 편이라 마치 반질거리는 장판을 쓸어내는 잇비나 갈목비처럼 여려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꾸물거리고 더뎠다. 아내는 이런 내 성격을 늘 못마땅히 여겼지만, 나도 아내의 칼로 자르듯 완고함이 쓸고 난 다음 자국을 남기는 대빗자루같이 어떤 상처를 남길 거라 늘 생각해 오고 있었다.

 

언젠가 아이가 제 어미와 언쟁을 하고 난 후에 어미의 성격을 내게 따졌다. 그네들은 빗자루보다 어쩌면 족제비 털로 만든 탄력 있는 붓이 어울릴 것 같다. 고리타분한 말투는 오래 찌든 때나 앙금처럼 영양가 없이 세대 차이만 키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젊은이가 나이 든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도 경험과 지혜가 부족한 데서 오는 혈기의 오류가 아닐까.

부부는 성격이 다른 사람끼리 만나야 잘 산다고 한다. 키 큰 사람이 아담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둘이 합하여 일이나 후사가 현재보다 낫게 되기를 원함이리라. 성격이 같은 사람이 살다 보면 한쪽이 반대로 변한다는데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일 게다. 여당과 야당이 있는 것이나 천사와 악마가 세상에 공존하며 연단의 도구로 삼아 우리 삶의 폭을 넓게 만들어 주는 것 같이 말이다.

 

겨울 채비로 문을 바를 때 고운 잇 비로 젖은 창호지를 살살 쓸어내리지 않고 거친 싸리비나 대비로 창호지를 훑어 내렸다간 시작도 전에 일을 망칠 것이다. 흙 무더기나 자갈을 잇비나 갈목비로 치운다면 성과도 없이 비만 못 쓰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빗자루도 다 같은 빗자루가 아니므로, 장인이 연장을 고르듯 사람도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가려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입술이 없고 손가락이 없어도 혀로 성경책을 넘기는 한센병 환자도 있고, 사고로 두 팔을 잃고 입이나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도 있다.

 

그들의 작품은 예전에 그렸던 것과 같다는데 곧 마음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몽당 빗자루는 풍성했던 숱이 닳아서 버려질 처지가 되었으나 아궁이 곁에 있다가 불씨를 쓸기도 하고, 우물가에 있다가 막힌 하수구를 뚫기도 하고, 마당에 섰다가 개똥을 치우기도 한다. 좀 불편하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어쩌면 계륵 같은 존재다.

몸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아끼지 않으며 질그릇이나 막사발같이 편하고 그래서 특별한 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것들에 몸을 던지는 사람은 몽당비를 닮았다 해야겠다. 젊은 날 우리를 키워내시고 이제 병상에 누워계시는 어머니는 마치 이가 다 빠진 잇몸 같아서 민첩하지도 볼품도 없지만, 입 안에 혀같이 지혜롭게 우리의 앞길을 쓸고 계신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화장실에 처음 들어갈 때는 냄새가 역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는 것 같이 한결같지 못한 사람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내가 병원에 문병 와서 어머니의 퇴원 후 거처를 위하여 먼저 대책을 세우고 어디로 모실 거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집에서 모셔야 한다 했지만, 아내는 요양원이나 시설에 모셔야 한다고 말했다. 이유인즉 맞벌이 살림에 누가 낮에 종일 붙어서 있을 것이며 시설만큼 불편함 없이 집에서 관리해 줄 수 있느냐는 주장이다. 이 일로 인해 전통과 현실, 수구와 개혁 간에 충돌이 생겼다.

무엇이 진정한 효도일까.

 

양초나 연필처럼 몸을 태우거나 닳아서 할 일을 마친 흔적은 애처로운 만큼 아름답기도 하다. 우리의 행복은 대궐의 구중심처에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나 부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짧아지고 낮아진 희생에서 더욱 진한 향기가 나는 것이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누구를 칭찬하는 척하면서 흉을 보거나 흠 잡는 척하면서 은근히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 보면 모두 부질 없는 다툼이고 어리석음에서 오는 수치만 남는다. 오직 약할 때 강하고 강함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강아지 앞에 넘어져서 배를 보이며 져주는 어미 개의 다정함과 내과 의사같이 지혜로운 심의가 되길 원하지만, 무정하리만치 확실한 외과 의사처럼 현실을 직시는 아내를 보면서 조금씩 변해가고 있으니, 우리는 어제의 갈목비도 대비도 아닌 은혜로 짝지어 묶어주신 시원스런 수수비가 되어 가는 중일 것이다.

 

* 대비 : 가는 댓가지나 잘게 쪼갠 대오리를 엮어서 만든 비.

* 잇비, 갈목비: , 갈대의 이삭을 묶어 만든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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