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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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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학/수 필

불씨

by 山海鏡 2011. 4. 23.

한낮의 온갖 소음을 멀리하고 아슴아슴 저녁이 찾아와도 자동차의 긴 행렬과 빌딩들과 잠들지 않는 가로등 불빛은 도시의 오염된 대기를 반사하며 하늘까지 불그스름하게 만들어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시원한 구석은 없어 보인다.

 

늦깎이로 배운 그래픽 일을 하고부터 그런 텁텁한 하늘조차 마음 놓고 올려다볼 여유가 없어진 것 같다.

아침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창으로부터 어슴푸레 들어오는 새벽 미명은 머리를 텅 비게 하고 몸을 무중력 상태로 만들어 버릴 것 같다.

 

이렇게 늘 시간과 싸움이다 보니 예민해지고,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가끔 실망스러운 때도 잦다. 며칠 잠 못 자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작품이 의뢰자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맥이 풀린다. 일의 흐름과 특성상 집중도가 높은 야간에 주로 작업을 한다. 며칠 밤샘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능률이 오르지 않거나 일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모든 것을 잠시 접어두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일은 점점 복잡해지고 더 많은 구속과 제약이 따른다. 이럴 때는 차라리 조금 불편했지만, 일이 단순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팔을 내밀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지는 초롱초롱한 별을 보던 유년의 푸른 별 밤이 그립다. 그냥 손으로 떠 마셔도 하나 해로울 것 없을 것 같던 개울물과 두레박으로 갓 길어 올린 시원한 고향의 우물물 한 모금이 그립다.

 

나는 엉덩이에 달라붙은 의자를 떼 내고 잠시 로비로 나가 정수기의 시원한 냉수라도 한 컵 마시며 조바심 이는 마음을 다독여 본다.

며칠 전 조카 딸 돌잔치를 시골서 하기로 했다는 전갈을 받고 내심 무척 반가웠다. 차일피일 미루어오던 혼자 계시는 어머니의 불편함은 없으신지 보살펴도 드리고, 몇 주 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이번 주말 동안이라도 내려놓고 싶었다.

내 차로 갈까 생각하다가 몸도 그렇고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아 버스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산유국들의 내전으로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비용도 절약하고 운전하는 수고도 덜고 느긋이 차창으로 들어오는 풍광을 보며 시골 길을 달리다 보면 기분 전환도 되고 여유로움에 소진된 기력도 조금 회복될 것 같았다.

 

역전이나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면 언제나 느끼는 감정 하나가 있다. 그것은 아마 잠시 후 승강로를 오르면서 이런 팍팍한 삶의 허물을 여기에다 오롯이 벗어 던지고 미련 없이 탈출하는 그런 개운함 일 게다. 그리움이 가득한 사람들끼리 마주칠 때 그 설렘이 배가 되는지도 모른다. 나도 그들처럼 들뜬 마음으로 구내매점을 기웃거리며 마실 것과 쓸 것 몇 가지를 집어 들었다.

 

오래전 버스를 타고 어느 촌락을 지나며 보았던 한 편의 추억이 떠오른다. 석양이 내리는 마을 입구에 저녁을 짓는 하얀 연기가 한 폭의 그림처럼 조용히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밀레의 저녁 종이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이 한 폭의 평화스러운 모습과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와 한 끼니 저녁을 짓는 아낙의 피곤한 행복, 내를 건너며 소에게 물을 먹이고 삽을 씻어 들고 돌아오는 평화로움은 어디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행복이 아닌가. 어린 눈에 비친 그 정감 어린 풍경 하나가 마음 깊은 어느 곳에서 아직 꿈틀거리고 있다.

 

아궁이에서 불집게로 숯을 꺼내서 볏짚이나 솔가리에 올려놓고 흔들고 불어서 불을 살렸다. 성냥도 있지만, 예전부터 해 오던 대로 아낙들은 꼭꼭 눌러 놓았던 재를 헤치며 아직 검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짚 검불이나 묻어 두었던 작은 숯 덩이를 찾아내었다.

밖에 처음 나온 불씨는 죽은 듯 검다. 그러나 잠시 후 바깥공기를 쏘이면 서서히 붉은빛이 생기를 띄며 홍시 빛깔로 살아난다.

 

어느 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겨울 초저녁에 어머니는 창호지를 바른 안방의 살창문이 훤히 밝아 보름달이 뜬 줄 아셨고, 달이야 뜨건 말건 잡곡 섞인 밥공기들을 두레상에 놓으며 국 냄비에서 구수한 시래기 된장국을 한 사발씩 떠내고 계셨다. 다섯 식구는 제 앞에 놓인 밥과 젓갈 내 나는 짭짜름한 무김치를 베어 먹느라고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밖이 조금 더 소란스러워 문구멍에 붙여 놓은 유리로 내다보니 사람들이 사립에 분주했다. 불이 났었다. 밥 먹을 때 살창 밖으로 보인 것은 보름달이 아니라 우리 사립에 일어난 불꽃이었다. 함석 물동이와 세숫대야를 든 사람이 몇이 숨찬 소리로 말했다. "이 집주인은 도대체 뭐하나?"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을 보니 수숫대에 불이 붙어 한창 타고 있었다고 했다.

불은 급히 끄야 하겠고 물을 퍼 나를 것을 찾아 뛰어가며 아무개 집에 불났다고 알리면서 이웃 몇과 급히 물부터 담아와서 장정 두 길 만큼 타오르는 불길을 가까스로 잡은 것이다. 그들의 후줄근한 아랫도리는 이미 몇 차례씩 길가 웅덩이에서 물을 길어온 것 같았다.

 

주인은 밥 먹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고 이웃은 불 끄느라 서로 정신이 없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재 속에 남은 볏짚의 불씨는 오래지 않아 스스로 사위어 들고 말았겠지만, 그날따라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 재에서 불티가 곳간으로 날려갔다. 어머니는 당신의 과실로 생긴 불로 인하여 송구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온돌은 오래 사용하다 보면 구들장에 검댕이 붙고 방바닥에 재가 차서 웬만큼 불을 넣어도 방이 따습지 않다. 날씨가 흐린 날은 눈물을 머금고 밥을 지을 만큼 불이 들지 않는다. 하루는 재 넘어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어른들이 커다란 풍구를 아궁이에 대고 열심히 돌리며 굴뚝 청소를 하고 계셨다. 아궁이에 불을 넣은 후에 풍구를 돌리면 검댕이도 타고 재도 밖으로 날아간다.

 

처음에는 검은 연기가 굴뚝으로 펑펑 솟다가 나중에는 재와 함께 시뻘건 불꽃이 한 발이나 올라왔다. 막혔던 연도, 아궁이와 굴뚝 사이가 시원하게 뚫리는 풍구질은 얼마나 기막힌 소통인가. 누가 지금 풍구를 돌리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지붕에 불이 났다고 구경꾼들이 소리쳤다. 안에서 풍구를 돌리던 숨가쁜 사람들이 밖으로 뛰어나와 이번에는 물을 퍼다 붓지만, 불은 폴짝폴짝 뛰면서 피해 다녔다.

사다리로 올라가서 낫으로 이엉을 벗기며 물을 뿌렸다. 그러자 불은 다른 쪽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저기를 찍어 내어도 잡을 수 없고 고무신 바닥만 뜨거워 모두 뛰어내렸다. 결국, 초가집 지붕 한 채가 다 타도록 모두 넋이 나가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강 건너 불이 아니라도 이웃집 한두 집 건너에서 불이 나면 그 구경거리가 자못 흥미롭고 재미있다. 남이야 어떻든 웃음까지 나온다. 불난 집이 잘 된다는 이야기는 화도 주고 복도 주는 불 도깨비장난인지 알 수 없지만, 더욱 부지런히 살라는 덕담으로 들린다.

 

버스가 어머니께서 계신 내 고향 후포에 도착했다. 동해안의 7번 국도는 올 때마다 달라져서 자주 오지 않으면 어느 외딴곳에 온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서울서 고향 가는 길이 많아 계절 따라 운전대를 잡은 사람의 입맛대로 갈 수 있어서 참 좋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멀어서 팔이 잘 닿지 않는 등의 한가운데 같은 곳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발전이 늦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청 소재지인 울진에는 원전이 있다.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친환경 청정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일본과 같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얼마 전 일본의 지진 해일의 참혹함을 보면서 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를 체험하였고, 구제성금 접수창구의 우리의 온정의 열기와 반대로 독도 영유권 주장을 보면서 실망의 그늘은 더욱 깊어지니 반일 감정의 불씨는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일을 감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찾아내는 것은 왕의 영광이라 하였다. 타인의 배려 없이 술에 취한 듯 제 말만 내세우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보다는 숨겨진 마음의 소중한 씨앗을 찾아 한 사람 진정한 벗을 얻게 된다면 그 기쁨 또한 왕의 영광에 비할 것인가.

60년대 중반쯤 되었을까 오래된 이야기를 생각해내느라 힘들었지만 살풋살풋 열리는 추억의 그 시절로 다시 한 걸음씩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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