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끝나고 십여 년 정도 지난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파르르 소리를 내며 바늘 같은 솔잎이 타는 소리가 조용히 들리는 부엌에는 무쇠솥이 걸린 까만 아궁이 앞에 어머니가 마른 솔가리를 조금씩 던져 넣으며 큰 솥에 노란 좁쌀 한 홉에 쌀 한 움큼을 그 위에 얹고 금쪽같은 조반을 짓고 계셨다. 나무를 대신해서 선산에서 긁어 온 솔가리는 진득함이 없이 금세 굴뚝에서 파르스름한 옅은 연기를 내며 허공으로 흩어져 나갔다.
야산의 산림은 일제강점기에 학교에서 공출한 송진 채취와 벌목으로 황폐되었고 회복이 채 되기도 전에 다시 6·25 전쟁으로 산은 인민군 군복색으로 누렇게 변해 버렸는데, 가난한 살림살이에 연탄이나 석유를 쓰는 집은 별로 없었고 사람들은 땔감을 얻으려고 남아 있는 마른 풀이나 나무뿌리까지 뽑아 가서 그나마 남아 있던 산의 몰골은 말할 수 없이 사나워졌다고 했다.
겨울 끝자락의 황량한 들판은 잔설 속에서 머리를 내민 보리와 선산 솔밭의 푸른빛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었으나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어린아이의 갈색 머리카락을 흩으며 허름한 옷 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산기슭 양지에 두터워진 봄볕으로 황토가 흘러 내리고 돌담 아래부터 파릇한 풀색이 조금씩 번져 갈 때면 양식 항아리는 벌써 딸그락 바닥 긁는 소리를 내었다.
무 구덩이 속에 팔을 한참 휘저어야 손이 닿는 무와 헐렁한 고구마 포대와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진 원조 밀가루가 조금 있어도 어른들의 허기진 생계는 여전하지만, 손등과 소매가 까맣고 번들거리는 아이들의 빨간 볼과 초롱한 눈망울 속에는 행복이 있었다.
설날 지나 보름까지 마을의 풍물패가 지신밟기를 하러 돌아다닐 때 아이들은 날리는 연에다 편지를 보내며 소원을 빌었다.
아침 찬 바람은 북서쪽에서 바다 쪽으로 불고 하늘은 맑고 깊었는데, 얼레를 잡은 나를 흙담 밑에 세워놓고 아버지께서 저만치 연을 잡고 뒤로 물러서자 얼레는 실이 풀리며 빙글빙글 돌고 연과 아버지의 옷자락은 찬바람에 펄럭였고,
나를 공중에 펄쩍 들어 올리셨던 것처럼 연을 위로 던지자 얼레를 돌리며 높이 솟구쳐 마치 하늘을 나는 물고기처럼 좌우로 길게 헤엄쳐 다녔다.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시는지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차가운 맞바람에 그대로 오랫동안 서 계셨다.
상밤터는 대략 5리 정도 들어가 있는 농가로 이, 삼십 세대가 산자락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고. 하밤터는 해안선을 따라 집들이 따개비 같이 붙어 있는데 철 따라 멸치와 전어 후리에다 미역을 내는 작은 어촌이다.
우리동네는 해안선을 따라 생긴 외길 신작로 덕분에 정류장과 다방, 약국, 중고등학교가 있어서 촌사람 앞에서 약간은 우쭐한 기분도 들었지만 정작 농번기에는 들일을 나가고 어번기에는 배를 타는 우리는 두 가지 애환을 함께 맛보고 살았다.
제사가 드는 저녁 때면 빠짐없이 어르신들이 하나 둘씩 모이는데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한복 옷고름을 펄럭이며 드나드는 것을 보면
"누구네! 무슨 날이다." 하고 사람들은 쪽집게 처럼 알아 맞혔다.
댓돌 위에는 짚수세미로 때를 벗긴 흰 고무신은 콧배기에다 제각기 표시를 하여 두었고 안방과 연결된 부엌에는 재수 준비로 바빴다.
고구마 감자 명태포 가자미 두부는 전으로 부치고, 어물은 조심스럽게 쪄서 목기에 담겨 상에 올려졌다.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은 자정이 넘어야 기다리던 떡 몇 조각과 음식을 한 몫씩 받아드는데 제법 사람 대접을 받는것 같았고 그나마 쌀밥을 먹어보는 날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저 학년 어느 날 큰집에 제사가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아버지를 따라 나섰지만 엄청난 바람에 한 걸음도 못 떼고 결국 나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머리 위로 겉옷이 폭 씌워졌었다.
뒤로 주춤거리게도 하고 밭으로 밀어 넣기도 하는 고약한 바람이 어지간히 아버지를 애먹였지만 나는 아버지의 허리를 꼭 붙잡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보릿고랑 위로 삐쭉 나온 그루터기에 고무신 스치는 소리와 옷자락이 나부끼는 소리와 힘이 부친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들렸다.
몇 분을 지났을까 조금씩 내리막을 느낄 때 쯤 고개 정상을 넘어 먼발치로 아버지는 후포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계실 거라 짐작이 되었다.
바람이 약간 누그러들어 조용해지자 따스한 온기에 아버지의 등을 긁어 주며 맡아오던 냄새가 옷 속에 차올랐다.
다시 세월이 흘러 내가 아버지 만큼 어른이 되고,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 만큼 늙어 회갑을 맞게 되었을 때 그날 나는 하객들의 권유로 아버지를 한 번 업어 드리게 되었는데 마당 두어 바퀴 돌아설 때 어깨를 털썩이며 흐느끼시던 아버지를 느꼈다. 아마 어렵게 살아온 서러운 날들이 한꺼번에 어지럽게 스쳐가고 자신을 위하여 남아 있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생각하셨으리라.
樹欲靜而風不止하고 子欲養而親不待라 하였던가?
내가 이제 살만하여 부모를 모셔도 될 나이가 되었는데 당신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고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고 계셨다.
폐암 말기로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내가 아버지를 업고 내렸다. 어린시절 나에게 내어 주셨던 따스하고 믿음직한 등은 어디로 가고 진액이 다 빠진 등신불 처럼 딱딱하고 가벼운 아버지 때문에 그만 울컥 밀려오는 설움에 눈앞이 아득했다.
며칠 전 일 때문에 하룻밤을 사무실에서 보내고 저녁에 퇴근버스를 탔을 때 내 옷에선가 몸에선지 어릴 적 아버지의 등에서 맡았던 그 냄새가 어렴풋하게 피어올랐다.
오래전 바람 살이 차가운 어느 겨울 아침에 아버지께서 연을 던져 올리시며 나에게 어떤 기대와 꿈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해나가는 어설픈 나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몸서리치며 견뎌오신 험한 세월이 지친 내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으로 화끈 번져 나간다.
눈물도 없이 맞이했던 아버지의 임종을 6년이나 지난 지금 아버지의 그리움으로 가슴 한편 울렁거림이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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