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문 학/수 필

흑백사진(첫눈)

by 山海鏡 2009. 6. 22.

쏴~ 하고 하얀 싸라기 눈이 창호지에 들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때는 눈이 훨훨 하늘로 올라가며 휴거를 했다.

 

촌 마을에 흑백텔레비전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일이다.

바람에 안테나가 돌아가면 화면에 쌀알 크기만한 무수한 점들이 흘러가며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은 옥상에 올라가서 방향을 맞추며 빙글빙글 돌리고 안방에서는 화면을 보면서 "조금... 조금더~ " 외치며,

삐뚤빼뚤 옆으로 빗금이 생기는가 싶다가 맑끔하게 화면이 정지하면 "그래~ 됐어 내려와~" 하며 밖으로 소리를 질러 대었다.

 

연속극에는 여로, 아씨, 전우, 팔도강산, 야간비행 이런 것을 했고 황정순, 태현실, 김희갑, 신구 이런 분들이 당시의 탤런트였는데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는데

시골 농삿일을 마치고 노근한 저녁이지만 너 나 할것 없이 눈물깨나 찔끔거리며 저녁시간이 기다려졌다.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는 공짜영화 같은 것을 안 보고 그냥 잘 수는 없었기에 저녁을 일찍 끝낸 촌부들과 아이들은 밤이면 밤마다 편한 신발을 끌고 TV가 있는 집 안방으로 몰려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방문을 열고 마루까지 점령하여 울고 웃었다.

 

연속극이 끝나자 광고 시간에 주인집 아들놈이 "열 좀 식혀야 돼~" 하며 전원 스위치를 톡! 꺼버렸다. 

미닫이 장롱에 다리가 넷 달린 텔레비전 앞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브라운관의 흰점이 사라지면서 잠깐 멀리 떠났던 마음이 원점으로 돌아오며 이웃들이 보였다.

십여 분이 지나면 벽걸이 괘종시계를 쳐다보면서 다음 연속극이 시작한다고 여기저기서 안달이 나면 못 이긴 척 다시 켜 주었는데 어지간히 유세를 떨기도 했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호롱불이나 남포등 아래 약간의 어둠은 상상력을 부추기고 적절히 몸을 숨겨주던 커튼 같았는데 문명의 혜택이랍시고 백열전구 하나가 방에 대롱대롱 걸리고부터 마치 외투를 홀라당 벗겨버린 듯 머쓱하고 서로의 시선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돈 들어간 값으로 세상이 밝아지니 바느질이나 잔일을 하기에는 무척 좋았는데,

라디오 시절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할 수 있게 했지만, 이번에는 텔레비전이 안방에 들어앉고부터는 우리의 시선까지 빼앗아버렸으니 가족 간의 진솔한 대화의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만큼 전통예법이나 어른들의 값진 지혜의 빛은 점점 가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컬러TV가 없는 집이 없고 고가의 홈시어터로 극장을 방불한 양질의 써비스를 만끽할 수 있지만,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웃과 가족은 물론 어쩌면 나를 실종시키는 상황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이 단절의 벽을 허물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 위해서 오늘 저녁 한 번만이라도 텔레비전의 코드를 뽑아 보는 것은 어떨까...

'문 학 > 수 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수 빗자루  (0) 2010.01.15
수수 빗자루  (0) 2009.10.27
흑백사진(어머니의 빈둥지)  (0) 2009.09.22
디딜방아  (0) 2009.09.01
흑백사진(고속도로)  (0) 2009.06.09
흑백사진(꼬꼬재배)  (0) 2009.04.28
칼라사진(엄마놀이)  (0) 2009.02.28
흑백사진(담배내기)  (0) 2009.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