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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학/수 필

디딜방아

by 山海鏡 2009. 9. 1.

디딜방아 / 황영원

 

대밭에 둘러싸인 상규네는 아래채 끝에 큼지막한 방앗간을 한 칸 따로 가지고 있었다. 명절 때가 되면 방앗간은 제수거리를 준비하는 이웃들로 분주하기도 했지만, 정작 주인은 남이 쉬고 있을 시간에 조근조근 작은 방아를 찧어 먹는지 이웃들이 이용할 때는 언제나 양보하는 것 같았고, 마당이나 헛간도 부지런한 주인을 닮아서 늘 소소한 일거리로 쉴 틈이 없었는데 실로 근자소복이란 말이 이 집만큼은 어울렸다.

 

연자방아는 소나 말이 무거운 연자매를 돌려서 찧으므로 방아 중에서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하고, 물레방아는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물레를 돌리므로 방아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 필요 없다. 디딜방아는 사람이 발로 오르내리며 디뎌 찧는다 하여 디딜방아요, 절구는 작아서 손으로 찧지만, 공이와 확을 쓰는 방아들의 원형이 되니 방아의 시조라 해야겠다.

 

상규네 방앗간 앞쪽의 절반은 헛간이고 중간에 트인 기둥 사이로 들어서면 저만치 안쪽으로 살창이 하나 있긴 했어도 방앗간은 늘 어둠침침했고, 다리를 쩍 벌린 박달나무 디딜방아가 긴 허리를 쭉 펴고 머리에 끼운 공이를 움푹 들어간 확에다 넣고 엎어져 있었다.

 

두 갈래로 벌어진 방아 다리 끝은 옴폭 패여 매끈매끈 윤이 나고, 비녀같이 허리에 꽂은 참나무는 움푹한 돌쩌귀에 얹혔는데 그 모습은 마치 두 팔을 벌리고 형틀에 묶여 평생 방아를 찧는 수인의 모습도 같고, 어찌 보면 난봉꾼이 여인을 품고 엎드린 것 같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혼자 댓돌 위에 매달린 방아 줄을 잡고 뒤로 자빠지며 있는 재간 껏 무게를 실어야 겨우 들리던 방아머리가 동생이 한쪽 다리를 밟고 올라서면 스르르 올라간다. 아이들의 작은 다리 하나라도 보탤수록 방아찧는 기분이 여간 가볍지 않았으니 어쩌면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어둡던 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밝아지고 호박 가를 비질하며 일으키는 먼지는 눈썹이나 어깨 위로 뽀얗게 쌓여 가는데, 곡식의 고운 가루 때문에 창으로 빗겨 든 가을 햇살은 손을 뻗치면 덥석 잡힐 것만 같았다. 방아가 들릴 때마다 어머니의 머리에 두른 흰 수건이 햇살 뒤로 잠깐씩 사라지며, ! ! 연신 방아를 내리찧으면 공이 잡은 흰 손도 희뜩희뜩 바쁘게 보였다.

 

이른 추석에는 햅쌀밥을 상에 올리려고 찐쌀 방아를 찧었는데 한 번씩 쉴 때마다 방아 머리를 옆으로 밀쳐 놓고 호박 안에 든 쌀을 꺼내서 키로 까불어 넣어야 하므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람들이 여럿 모여들어 품앗이 방아라도 찧게 되면 누가 건성으로 다리를 걸쳐만 줘도 힘이 나고, 이렇게 마음이 가벼우니 오르 내리는 장단에 맞추어 한 자락 방아타령이라도 나올 법 했다. 누구 한 사람이 방아 머리께로 내려가서 호박을 뒤젓거나 공이를 쳐들어 주면 방아도 절로 흥이 나는지 두레패의 상쇠처럼 고개를 흔들며 어깨춤을 춘다.

 

가루를 낼 때처럼 항상 힘있게 쿵쿵 내리찧는 것은 아니다.

콩이나 팥같이 매끄럽고 둥근 곡식은 호박에서 튀어나와 이리저리 흩어지니 처음에는 호박의 가장자리를 빗자루 같은 걸로 가리고 조심조심 찧어야 하고, 매끄러운 보리나 수수는 물을 부어서 잘근잘근 찧어야 한다. 그리고 일감이 많거나 방아 머리가 무거워 힘이 들게 생겼으면, 마치 고집 부리는 소의 코뚜레에 묶인 고삐를 당기듯이 여럿이 방아의 목에다 줄을 걸고 뒤로 당기며 찧었다.

 

방아 중에도 괴로운 방아는 고추방아다. 중간에 여러 번 가루를 채로 치며 찧는데 처음 몇 번까지 날리는 가루가 매워 울면서 찧기도 한다. 어떤 때는 먼저 쓰고 간 고추방아 덕에 시작부터 재채기에다 헛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데, 마늘과 생강을 마지막에 빻아서 호박 속과 공이를 닦고 또 배추잎으로 양념을 묻혀내면 겨울 김치의 양념 방아는 끝이 났다.

 

우물가나 빨래터에서만 소문이 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쿵쿵 시끄러운 방아를 오르내리면서도 아낙들은 입방아를 함께 찧는다. 얘깃거리가 떨어질 때쯤 되면 멀어 보이던 보리 방아도 수월히 끝이 나고, 고달팠던 시집살이 채증도 쑤욱 내려가지 않았을까.

씨앗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부대껴야 알곡이 되고, 알곡은 완전히 부서져야 다시 고운 가루로 태어난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듯 인생도 이와 같아서 시련과 고난 없이 열매의 깊은 단맛은 바랄 수는 없을 게다.

 

가끔 속이 부대끼고 미움이 생길 때는 쓴 뿌리 같이 모난 마음을 가루가 나도록 뽀얗게 찧어내고, 일하기 싫은 게으름도 꾹꾹 눌러 밀어내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가을바람이 소슬 일어나는 저녁이 되면 대나무 잎새 소리 우수수 들리던 옛날 상규네가 생각나고, 싸르륵! 싸르륵! 어머니가 찐쌀을 키질하시던 소리가 들린다.

찌그득 쿵..., 찌그득 쿵..., 방아다리에 올망졸망 붙어있던 아이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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