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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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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학/신앙 에세이

꿈꾸는 개복치

by 山海鏡 2018. 7. 10.

꿈꾸는 개복치 / 황영원


  바다를 베고 누웠다. 갈매기가 이리저리 밟고 다녀도 마치 난파선 잔해처럼 죽은 듯 고요하다. 맑고 파도가 잔잔한 날 해바라기 하는 개복치를 서양에서는 오션 썬피시(Ocean sunfish)라 부른다. 부레도 없는 물고기가 어쩌면 그리도 태연하게 하늘 끝 한 자락을 덮고 풍찬노숙을 한단 말인가!


  선장인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어린 시절 해수욕장에서 물놀이하다가 멀리 나갔을 때를 생각해 본다. 돌아보니 붐비던 백사장도 피서객 소리도 실처럼 아득하고 흰 구름 한 조각이 해변을 쓸고 있었다. 가끔 외마디 소성을 지르던 계집애들 소리마저 잠잠하다. 바다는 가늠하지 못할 깊이로 검푸르게 출렁대고 나는 부표처럼 외롭고 목이 말라 따가운 얼굴에 찬 바닷물을 끼얹었다. 주변에 보이는 건 하얀 배를 보이며 지나가는 갈매기뿐, 나는 두렵고 적적하여 노래를 부르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물 위에 가만히 누워보았다.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표류, 절대고독의 신비로운 순간이 바로 지금 내 앞에 펼쳐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위태롭고도 편안한 양가감정, 생사의 경계면에서 유체이탈의 무중력감을 느껴본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주치의 권유로 어머니를 고향의 요양병원으로 옮겨 왔다. 병이 깊어 곁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도 가슴에서 비가 내린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제부터 기쁘고 고상해야 할 인생의 아름다운 황혼기를 어쩌자고 병상에다 묶어 두시는 겁니까? 실어증과 함께 찾아온 반신불수로 인해 의사의 전달은 왼쪽 팔과 얼굴의 표정이 전부다. 기저귀와 소변줄을 하셨지만, 귀는 밝아서 곧잘 웃으셨다. 어느 날 내 손목을 꼭 붙잡고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까지 까지 깍깍 가?" 방언처럼 쏟아내시는 말씀에 놀랐지만, 이내 대답했다. "뒷밭에 자두는 따서 아이들 주고, 반은 분내미 누나줬어요!" 이렇듯 동문서답인데도 마치 자신이 그것을 물었던 양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큰 소리로 또 웃으신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셨을까? 이 긍정의 속내는 알 길이 없다. 그 소리는 까치의 지저귐이나 새소리와 비슷했다.


  어머니와의 대화는 언제나 나 혼자 하는 자문자답이다. 반나절 잠잠하던 병실에 잠시 생기가 넘치고 주고받는 대화로 소란스럽기까지 했다. 계절이 거듭될수록 치아는 빠지고 웃을 때 잇몸이 드러났다. 어떤 날은 기다리지 않고 주무시기만 하셨다. 숨을 쉬시는지 확인하고 또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불현듯 신비로운 꿈을 꾸는 개복치가 생각났다. 그렇다! 잔칫날에나 맛보는 흔하지 않은 개복치가 오일장에 올라오기만 기다렸다. 초장 맛밖에 없는 곤약과 같은 식감을 어머니는 기억하실 게다. 내가 개복치를 삶아 병원으로 잰걸음으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열여섯에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오셨다. 어린 내가 자라서 혼자 놀 수 있을 때쯤부터 농사철에는 동생을 나에게 맡겨놓고 먼 다랑논에서 저물도록 계시다 오셨고, 나는 종일 기다리다 나무를 이고 사립을 들어오시는 어머니를 보고 달려나가 밥부터 달라고 졸랐다. 나뭇짐을 내려놓고 땀을 씻는 어머니의 옷깃에서 들의 냄새가 났다. 겨울철에는 정오 사이렌이 불면 어린 동생에게 젖 물리려고 먼 일터에서 걸어오셨다. 그렇게 어려운 세월을 살아오시며 늙어버런 어머니께 이제는 내가 저녁을 먹여 드리러 간다.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가지만, 시계를 보시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어머니는 그날도 평소처럼 내가 올 때까지 병실 출입구만 바라보고 계셨다. 찬물에 헹구어 얇게 썬 개복치를 초장에 찍어 입에 넣어 드렸다. 어머니의 쪼글쪼글한 입으로 들어가는 투명한 살점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이렇게라도 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그러나 살가운 행복을 질투하듯 입원하고 3년이 다가올 무렵 폐렴이 왔다. 바깥세상 이야기를 곁들인 미음 숫가락을 이젠 마다하신다. 잘 잡수시던 갓 썰어 온 문어나 도다리 회도 드시지 못하시고 자꾸 주무시기만 하신다. 결국 집중관리실로 옮겨지고 주렁주렁 장치가 몸에 붙었다. 집중관리실 풍경은 일반 병동과는 풍경이 사뭇 다르다. 여기저기 심전도기가 머리맡에 우두커니 서서 환자를 지켜보고 있고, 산소통은 뽀글뽀글 애가 끓는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기 전에 거치는 마지막 의료행위다. 이 방으로 병문안을 오는 나이 든 자식들은 하나같이 제 어미 곁에 붙어서 젖뗀 송아지처럼 엄마! 엄마! 엄마! 자꾸만 불러댄다. 


  새벽 무렵 간간이 병동을 순회하는 간호사의 걸음 소리와 통증 환자의 신음 외에는 대부분 잠이 든다. 옆자리에 삽관한 환자의 호흡이 거칠다. 자기의 폐에 차인 물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의 소리 같다. 뚫어 놓은 기관지에서 물이 뿜어 나온다. 썩션! 썩션! 응급실 침상에 누웠어도 구조요청이 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다. 자식들은 이러한 그늘을 어찌 알겠는가? 일상에 쫓겨 자주 못 오는 가난한 자식, 입원비나 내면서 찾지 않는 자식, 무조건 오래 사시는 게 좋은 줄 알고 편안히 죽을 권리도 빼앗는 자식..., 요양병원을 싫어하는 어르신들의 말씀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거기 가면 고려장이여!"


  며칠 전부터 발끝에 청색증이 올라와 보호자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눈을 감고 계신 어머니의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 하얀 옷 입으신 분이 오시라고 부르시면 돌아보시지 말고 따라가세요!" 이 말을 마치자 얼굴이 화끈하고 가슴이 먹먹하게 저렸다. 이것은 내가 어머니에게 해드린 마지막 부탁이 되고 말았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평소에 즐기시던 찬송가를 귀에 들려 드렸다. 찌푸리고 계시던 미간이 스르르 풀렸다.

  입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염을 마친 싸늘한 어머니의 형해를 칠성판에 올려놓고 얼굴만 보여주며 작별인사를 권했다. 떠나는 자와 남은 자 사이에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양배추처럼 겹겹이 감싸는 염사의 손놀림이 끝나자 막내와 나는 말없이 오동나무 관을 천천히 덮었다. 목사님과 성도들이 찬송가를 불렀다. 이제는 따스한 햇볕이 드는 아버지 곁에 나란히 누워 부부가 다정하게 해바라기를 하신다.


* 개복치: 복어목 개복칫과에 속하는 초대형 경골어류로서 학명은 몰라몰라(mola mola)로 그 뜻은 라틴어의 맷돌인데 개복치의 둥글게 생긴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개복치가 물에 떠 있는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게 없지만, 어부들은 해파리를 양껏 먹고 깊은 잠에 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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