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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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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학/신앙 에세이

종소리(흑백사진)

by 山海鏡 2021. 3. 27.

이미지출처: https://blog.naver.com/virtree/222538245424

 

종소리(흑백사진)/  황영원

  손에 쥐여준 종 줄을 잡았을 때 내 몸은 한길이나 솟구쳐 올랐다. 종소리와 함께 하늘 두레박이 안아 올리는 공중부양 사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미풍에 굼실거리는 청보리밭과 그 너머 멀리 수평선에 걸린 하얀 돛단배! 나직한 해조음에 묻혀오는 교회 종소리! 내 순수에 찍힌 추억의 첫 장이다. 

  어머니는 앨범을 보시다가 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새댁이 때 예배당에 업고 가면 밭에서 무 뽑듯이 권사님들이 와서 쏙 뽑아 갔따꼬! 순뎅이는 울지도 않고 이 사람 팔에서 저 사람 팔로 자꾸 옮겨 가잖나? 나중에는 어디 있는지 찾아도 안 보이고 젖은 퉁퉁 불어오고, 나도 한번 안아보고 싶은데 참말로 속이 상터라..." 어느 권사님의 팔에 안겨있는 조그만 내 사진을 가리키며 회상하셨다.

  젖먹이가 목을 가누고 다리에 힘이 들어갈 무렵부터 할머니는 손바닥에 올려놓고 "동그랑땡 동그랑땡! 황새란 놈은 다리가 길어 우편배달로 돌리고~ 까마구란 놈은 얼굴이 껌어 구들쟁이로 돌리고~ 우리 원이는 얼굴이 희어서 백합화 꽃으로 돌려라! 얼싸절싸 잘 넘어간다 동그랑땡..."  스스로 붙인 가사 속에는 구들 놓는 아들의 검뎅이 묻은 얼굴과 하얀 손주의 얼굴이 다 들어있다. 예배당에 다니시던 할머니 세대의 유행하던 창가 <동그랑땡> 노래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믿음을 대물림하여 열여섯에 시집와서도 시어머니와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나의 유년 시절의 추억 대부분은 어머니와 겹친다. 유독 네댓 살 무렵의 기억들이 더 또렷한 것은 본향과 조금 더 가까운 탓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고대기를 잿불에 묻으며 거울 앞에 앉으면 그윽한 분냄새와 동백기름 냄새가 초가삼간에 가득했다.

  중밤터 우리 집에서 예배당까지 가는 데는 한 시간 남짓 걸렸을 것 같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살구나무 흙담을 끼고 돌아 꼬불꼬불 논둑길을 따라나섰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옛길! 지금은 마음속에만 아련히 남아있다. 

  마지막 길모퉁이를 돌 무렵부터 종소리가 크게 들렸다. 몇 걸음만 더 옮기면 벼랑 위에 솟은 종탑이 보이고 커다란 종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울렸다. 종탑은 바위 절벽에 지은 제비집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예배당으로 오르는 바위틈에 갯강구들이 스르륵 스르륵 지나다니고, 계단 구석을 꼬물꼬물 공 벌레들은 발소리에 제 몸을 또르르 구슬처럼 말았다. 

  예배당으로 난 바윗길은 조붓하고 가팔랐다. 힘겹게 올라가는 데 종루에서 한창 종을 치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 손에 종 줄을 쥐여 준 것은 종지기였다. 몸이 키만큼 번쩍 들려 올려졌다가 내려왔다. 종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우레처럼 꽝꽝! 큰소리를 내었다. 잡은 종 줄에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저렇게 크고 무서운 것이 금방 아래로 쿵! 하고 떨어질 것 같았다. 예배를 드리는 내내 그 생각만 났다. 

  예배당 안은 온화하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천정에는 우윳빛 둥그런 전등이 매달려 있었고, 마룻바닥은 반들반들 미끄럽고 윤기가 났다. 어머니는 들고 오신 성미를 성미함 뒤주에 부으시고 어른들과 마룻바닥에 앉아서 큰소리로 찬송가를 불렀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낡고 악보조차 없는 누런 찬송가를 펴놓고 힘차게 불렀다.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며 폐허로 변한 이 강산에 다시 희망의 불씨를 지핀 감격스러운 찬송이다. 나는 뒤편에 있는 진열장에서 눈 감는 인형을 구경했다. 파란 눈의 소녀 인형이 부엉이처럼 한쪽 눈을 감고 있었다. 

  몇 해 전 고향 집 묵은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눈에 익은 빛바랜 사진 한 장! 어릴 적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보았던 목사님의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리스도의 날까지 허물없이 살자’라고 씌어 있었다. 죄필사망 罪必死亡 이정표 옆으로 자동차가 낭떠러지 위로 가고 있었고, 신필영생信必永生 이정표 옆에는 좁은 길 끝에 예쁜 교회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이 사진이 어린 눈에 깊이 각인 되어 있었다.

  모태신앙의 특징은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체험이 육화되어있다. 갑자기 뜨거워지지도 않지만, 쉽게 식거나 흔들리지도 않는다. 어릴 적 모교회와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성경 말씀과 속회를 드리면서 다져진 끈끈한 성도의 교제가 서로 의지하며 팽팽히 당겨주고 있음이다.

  지금은 사생활 침해로 교회의 종탑의 종소리가 멈춘 지 오래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시각을 알려주는데 종소리는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추억의 종소리는 지친 영혼에  맑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의 삶 자체가 종이 되어서 스스로 세상을 향하여 울림을 전달해야 한다. 혼돈과 탁류를 맑히는 진실한 복음의 씨앗이 종소리가 되어 이방인들의 가슴에 파종될 수 있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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