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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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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학/신앙 에세이

빛의 소리

by 山海鏡 2023. 2. 26.

빛의 소리

황영원

  하늘과 땅의 경계뿐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물조차 식별할 수 없는 참담함, 달도 별도 없는 그믐의 밤하늘은 먹에 가깝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와 별 몇 개 박혀있는 밤하늘은 보석처럼 더 깊고 푸르다. 딥불루(Deep Blue)는 한색(寒色) 계열로 차분하고 냉정함을 지닌 이지적인 색이다. 나는 도회지의 희뿌연 삶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청량한 밤을 꿈꾼다.

 

  지난해 초여름 1박 2일 모임이 울산에서 있었다. 낮에 태화강 십리대숲을 둘러보고 저녁 무렵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아늑한 교회 수련원에 도착했다. 목사님은 일찌감치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해놓고 계셨다. 저녁을 겸한 행사를 마치고 일행은 정갈하게 마련된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자정 넘어 소등하며 우연히 바라본 정원은 실루엣만 어렴풋이 남기고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사무실에서 며칠 긴장했던 탓인지 여정의 피로와 겹쳐 이내 곯아떨어졌다.

 

  그토록 기다렸던 딥불루는 무심결에 스쳐 지나가고 감동은 이튿날 새벽 무렵에 찾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몽사몽 꿈속으로 찾아온 것은 여린 리듬이었다. 잠든 아기의 숨결 같은 규칙적인 새 소리가 거대한 적막을 혼자 떠받치고 있었다. 저 애간장이 녹아내릴 듯 단조로운 호곡! 마치 촛불 한 자루 켜 놓고 또박또박 읽어 내리는 간절한 기도처럼 내 안에 들어와 환하게 발화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귀에 익은 새 소리가 그날 밤 유별나게 마음을 끌어당겼다. 반가움에 여유로움을 더하여 내 마음은 벌써 푸릇한 세계를 거닐고 있었다. 상방에서 할머니와 누워 잠을 청할 때 대나무 잎에 바람이 이는 소리와 뒷산에서 부엉이와 소쩍새 소리가 들린다. 예전 같으면 무심코 돌아누웠을 테지만, 이제는 새소리조차 나에게 말을 건넨다. 

 

  저렇게 타이르듯 전해주는 조용한 가르침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새는 새의 말을 하지만 나는 '귓속의 귀'로 그 소리를 듣는다. 예전에는 안다고 여겼던 것들조차 요즘은 모른다고 말하니 나는 아는 게 별로 없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단조로운 질문에는 위엄이 있고, 모든 반복에는 밑금이 생긴다.

 

  그래서 빵 한 조각을 놓고 기도할 때도 농부의 거친 손을 생각하고, 그의 어깨 위에 내리는 따스한 햇볕과 지저귀는 새 소릴 듣는다. 어디 그뿐이랴, 밀가루를 만드는 사람과 실어 나르는 차와 운전수, 깊은 바다 밑의 석유를 채굴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생각한다. 이 모든 경로의 수고가 모여서 여기 한 조각 성찬이 되었다. 내 앞에 앉아 함께 빵을 나누는 당신의 눈을 보며 오늘 하루를 감사한다.

 

  어둠을 지키던 소쩍새는 물러가고 크고 작은 새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새들이 이 산과 저 산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저마다 빛으로 오시는 이를 노래한다. 저 새들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나무가 일어나서 춤을 출지도 모를 일이다. 청아한 새소리에 귀를 씻고 나도 저들의 순전한 예배에 동참한다. 날 때부터 울보는 담요를 머리 위까지 당겨 올렸다. 숨죽이며 누웠던 하늘과 바다는 깊은 포옹을 풀며 잔잔한 미소로 다가온다.

  누가 저들을 깨우는가? 보시기에 좋았던 첫날 기쁨이 호렙산 모세의 이마를 비추고, 나다나엘이 앉은 무화과나무에 그늘을 만들고, 신라의 석굴암을 짓던 석공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씻는 바람을 만들고, 지금 새벽안개를 걷어내며 새들의 날개 위에 살갑게 내려앉고 있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두견이 또는 두견새로 불리는 새는 따로 있지만, 고전에서 두견새는 대부분 소쩍새라고 한다. 귀촉도나 자규로 불리는 두견새는 밤마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대여섯 살 무렵 어느 추운 겨울밤 젖먹이 동생이 떠났다. "복아! 복아! 영복아...!" 어머니는 밤이 새도록 동생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으셨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어머니를 보고 울었다. 물리던 젖은 적삼에 뚝뚝 떨어지고 멍울졌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른 새벽 이웃집 어르신을 모셔 왔고, 할머니는 지고 나서는 발밑에 바가지를 놓고 밟고 가게 하셨다. 새 봄이 되면 애기 무덤의 진달래가 더 붉다고 했다. 슬픔은 진달래꽃처럼 붉지만, 딥불루는 그 슬픔을 참아내는 색이다.

 

  뻐꾸기와 두견은 남의 둥지에 탁란을 하는데, 부화한 새끼들마저 숙주의 알을 밀어낸다. 세상은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듯 보이나 엄밀히 들여다보면 실로 사사롭다. 그러나 황새는 황새의 일을 하고 뱁새는 뱁새의 일을 한다. 뻐꾸기가 찌르레기의 노고와 죽은 동생을 생각는지 오뉴월 긴 긴 날 산을 옮겨 다니며 운다. 모내기를 하는 농부들의 바쁜 마음에 주는 평안과 위로는 감히 흉내를 내지 못할 만큼 기름지고 복되다. 탁란이라는 불합리한 조합마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씀하실 것만 같다.

  이런 새들의 노래하는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우리도 세상 살면서 은혜와 감사를 배워야 한다. 감사가 없는 세상은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다툼이 넘친다. 평등을 오래 외치다 보니 상하가 무너지고 거짓과 진실의 구분도 못하는 혼돈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딥불루는 이런 칠흑 같은 밤의 거센 파도를 견뎌내는 외로운 등대나 사막의 별처럼 분명한 방향을 가리키는 희망의 색이다. 침묵 가운데 우레와 같이 말을 거는 이가 내 속에서 자꾸만 딸꾹질을 일으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은혜를 입은 자는 기쁨의 삶으로 보답한다. "감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라 하였으니 오늘도 기도와 말씀으로 내 걸음과 주변을 살핀다. 선과 악이 충돌하며 다투는 포성은 물러가고 평화의 노래가 속히 들렸으면 좋겠다. 소리는 모든 생명 활동에서 생겨난다. 그 소리가 감사와 은혜의 고백일 때 가장 아름다운 빛의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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