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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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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학/신앙 에세이

후리포(갈릴리 어부)

by 山海鏡 2021. 5. 29.

사진출처:https://blog.naver.com/tjtksekd/222582290887

후리포는 내 고향 울진에 있는 후포항의 정겨운 옛 이름이다. 오랫동안 그리 불리던 터라 귀에 익어 지금도 어색하지 않다. 혹자는 후리포의 어원을 옛 지명 휘라포(輝羅浦)에서 찾으며 '비단바다'라고 말하지만, 동해의 물결은 비단보다 거칠고 때로는 난폭하다. 그러나 고깃그물을 깁는 노인들의 성성한 백발이 미풍에 흔들리면 바다는 몸을 잘게 부수며 정어리 비늘처럼 일어선다. 신비로운 바다 휘라포는 한글 창제 이전에 한자를 잠시 빌려 쓴 음차(音借)#1로 보이므로 말은 '후리포'라 부르며 글만 '휘라포'(輝羅浦) 로 적었을 법하다.

  어머니 병수발을 위하여 후포에 내려갔을 때 일이다. 7번 국도를 차로 달리면 아침 해는 바다 위에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따라온다. 이 생경한 풍경이 익숙해질 무렵 벗들도 가끔 만났다. 혈기가 넘치는 뱃사람도 있고 논밭을 일구는 어수룩한 농사꾼과 마을 이장도 있다. 어촌의 말투는 거칠고 성격은 급하다. 그러나 항구에 있는 모 교회 성도들은 대조적으로 양순하다. 저들도 같은 바다에서 생계를 꾸려가지만,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들의 기도와 찬양은 힘찬 바다를 닮았다.

  실상 목소리 크고 성격이 급한 사람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천진하고 순박하다는 걸 바로 알게 된다. 짭짜름한 바닷바람이 불던 어느 날, 몇 며칠을 바다에 나가 조업을 하고 돌아온 집사님이 내 앞자리 건너편에 앉아 계셨다. 나는 문득 갈릴리 호수의 어부 제자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기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속성은 별반 다르지 않다. 바다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어부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갈릴리의 억센 어부들을 보는 것 같다.

  일기예보를 들어도 먼바다로 출항하면 예상치 못한 위험이 많이 따른다. 그래서 항구는 유난히 무속인과 당집이 많다. 마음을 추스르고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며 활기차게 나서지만, 작은 어선이 망망대해에선 풀잎이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고 잡은 물고기가 적을 수 있다. 무사히 가족 품으로 돌아오기만 해도 감사한 일이 아닌가? 많든 적든 그 손에 들려진 예물은 값지고 귀하다. 만날 때마다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시던 집사님이 계셨다. 나의 재택근무와 돌봄이 일상이 겹치면서 끝내 찾아뵙지 못하고 올라왔다. 저들 앞으로 한 걸음만 다가가면 더 정겹고 친밀한 성도의 교제가 되었을 것이다.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 커피 한 잔을 들고 교회 앞 전망대에 기대서면 가슴이 탁 트인다. 절벽 아래로 보이는 지붕과 항구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지만, 하늘과 맞닿아 사라지는 수평선, 춤추는 하얀 갈매기와 반짝이는 물비늘! 아주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나의 감성을 소름 돋게 하는 질료는 여전하다.

  연안의 통통배보다 돛단배가 많던 그 시절! 후릿그물이 해변 백사장 가까이 당겨져 오면 고기 떼는 갈 바를 몰라서 이리저리 살 같이 헤엄치며 부서지는 파도를 뚫고 백사장으로 튀어 올랐다. 물속은 반짝이는 비늘이 요동친다. 살아있는 생명의 약동이다. 머리 위를 빙빙 돌며 기다리던 갈매기 떼와 그물을 당기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지른다. 아이들은 굽이치는 파도에 아랑곳없이 뛰어들어 펄떡이는 고기를 잡아서 몇 번씩 벗어든 자신의 검정 고무신에 담지만, 다른 한 짝은 저만치 뒤집혀서 파도에 떠밀려간다. 잠시 치열한 전투와 승리의 희열감을 맛본다.

  과연! '빛나는 그물'의 휘라(輝羅)가 목전에서 펼쳐졌다. 그물에 가득히 담겨 올라오는 기쁨과 풍요로움이다. 베드로의 눈빛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노련한 어부 베드로와 형제들은 갈릴리호숫가에서 손질하던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남겨두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나라면 선뜻 그리할 수 있었을까?

  예전에 후리하는 광경을 추억해보면 구약 출애굽기의 아말렉 전투를 연상시킨다. 망잽이가 산 위에서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나팔과 깃발로 신호하면, 뗏마선의 젊은 어부들은 재빠르게 노를 저어 고기 떼를 그물로 에워싸고 밧줄을 부둣가로 던졌다. 기다리던 마을의 노인들과 아녀자들이 두 패로 나뉘어 그물을 힘껏 당겼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 지팡이를 높이 들고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아말렉을 무찔렀다. 모세가 지쳐서 팔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므로 아론과 훌이 모세를 앉히고 그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양쪽에서 붙들어 아말렉을 끝까지 물리쳤다. 합력하여 승리를 거두는 모습은 서로 닮았지만 후리는 육신의 전쟁에 속하고 아말렉 전투는 영적인 전쟁에 속한다.

"무릇 장평의 병졸은 그 용맹이 옛적과 다르지 않고 활과 창의 예리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었지만, 염파가 거느리면 승리할 수 있고 조괄이 거느리면 자멸하기에 족하다."#2 아직도 허구의 표식을 흉배처럼 자랑스럽게 붙이고 다니는 그들을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도 지도자의 올바른 선택에 달렸다. 산에서 기도한 선지자는 모세 외에도 선지자 엘리야와 발람이 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끝까지 기도하며 바알의 술사들을 물리쳤으며, 발람은 이적 행위로 이스라엘이 온역에 걸려 민족이 거의 망할 뻔하였다. 지금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가 분명하다.

아름다운 등대가 있는 후포의 등기산은 선사시대 유물이 말해주듯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산이다. 예로부터 밤에는 등불로 낮에는 깃발로 뱃길을 안내하여 등기산(燈旗山)이라 부른다. 그리고 옛 지명 후리포를 버리고 현재의 후포(厚浦)를 쓰게 된 데는 아무래도 비릿한 후리질이 부끄러웠을 수도 있었겠다.

우리의 삶은 항상 녹록하지 않으며 가끔 풍랑과 어두움으로 앞길이 막힐 때도 있다. 시야를 높이면 큰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만나와 메뚜기나 메추라기로 광야에 예비함과 같이 먼바다의 물고기가 연안의 포구로 몰려온다. 우리는 산에 올라서 바다를 바라보는 선진들의 지혜로 내일을 준비하자!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베드로처럼 이레의 하나님과 닛시의 하나님을 바라보자!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추억을 되새기며 고향 후포를 소개했다. 머지않아 국내 최대 요트 경기장인 <후포 마리나항>이 개장되면 미항 후포는 바다의 실크로드로 새롭게 태어난다. 고향에 갈 때마다 등기산에 올라 전설 속의 예쁜 고래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광활한 바다를 바라본다. 어쩌면 '비단바다'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1) 音叉: 차자 표기에서,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일
2) 연암, 『소단적치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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