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황영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한눈파는 사이에 곧게 타오던 이랑에서 보섭이 빗나간다. 내가 몇 해 전 시골집으로 내려가 있었을 때 일이다. 해 질 무렵에 추녀의 끝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누가 쳐다보고 있어도 괘념치 않고 한땀 한땀 자로 잰 듯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거미는 여덟 개 다리와 몸이 하나처럼 움직였다. 무심한 듯 보이는 기계적인 몸놀림은 어느 한 부분도 늘어지거나 좁은 부분이 없이 일정하고 가지런했다. 힘에 부치면 잠시 쉬었다가 계속했다. 마침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정갈한 수공예가 허공에 걸렸다.
내가 낡은 사진첩을 보다가 앳되고 고운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시집살이도 서툴던 새댁의 모습이다. 이제는 영감도 보내고 자식들 여의고 혼자 집을 지키시는 어머니를 보면 거미가 생각난다. 한낱 미물이나 염낭거미는 자신을 헐어 자식에게 진액을 전부 내어주고 빈 껍질로 생을 마감한다. 곤히 주무시는 어머니의 수척하신 모습을 보며 "수욕정이 풍부지, 자욕양이 친부대(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를 나직이 읊조렸다.
우리 정서에 거미는 근심이나 어떤 불길한 예감을 상징한다. 요즘 만화나 영화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초인 역할로 나오지만, 몰래 그물을 짜는 음흉함과 타자의 실수를 바라는 데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한다. 다리가 많아 징그럽기도 하고 색깔도 혐오감을 준다. 이들은 개미 벌처럼 일하지도 않고 무고한 생명을 겁탈한다. 만일 거미를 아기에게 보여준다면 고개를 돌리며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풍뎅이 한 마리가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뻘쭘하게 열린 등딱지가 거미줄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거미는 재빠르게 다가와 인정사정없이 포박했다. 삽시간에 까만 몸이 하얀 부댓자루처럼 변했다. 교미를 끝낸 수컷도 어물어물하다가는 죽는다. 꽁꽁 싸매는 손놀림은 염사와 닮았다. 졸지에 포박당한 무고한 포로는 따끔한 독침 한 방으로 기절한다. 외피를 뚫고 들어온 독액이 근육과 세포를 녹여 육즙으로 만든다. 파리 같은 곤충은 2~3시간이면 족히 녹인다고 한다. 독액에 신경 마취제와 소화액이 들었기 때문이다.
밝은 세상에 살면서 아직도 뇌물을 받는 불의한 법관과 거짓말을 부끄럼 없이 내뱉는 정치인을 보면서 우리는 절망한다. 언제쯤 정의와 공의가 강같이 넘치는 날이 올까? 과속을 단속하던 경찰관, 담을 넘던 좀도둑도 사라졌다. 감시 카메라 하나가 그들을 대신한다. 법을 통달한 AI가 법관으로 임용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얼마 전 불법 영장을 들고 와서 대통령 관저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염낭거미 새끼들을 생각했다. 주군을 해치우기 위해 내달리는 그들의 불의가 우리 눈에 고스란히 찍혀있다. 불한당처럼 타자의 공을 가로채며, 남의 실수에 희열을 느낀다면 야만이다. 측은지심까지 느껴지는 이들은 '거미형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미의 외모만 보고 미워해선 안 된다. 생태계 균형을 유지하고 해충의 천적으로 멸구를 사냥하여 농작물의 피해를 줄인다. 그들은 인간보다 더 정직하고 열심히 일한다. 복잡한 생태계의 일원인 거미는 고대부터 인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꽃과 동물 등을 나열해 놓은 *파이스토스 원반에 거미줄 패턴이 보인다. 아득한 시공간을 넘어와 손을 내밀고 있다. 나는 거미처럼 미동도 없이 그 가느다란 줄을 통해서 생명의 동질성과 미적 감각으로 오래된 비문을 읽는다.
거미는 먼저 주변을 탐색한 후 기초 줄을 세우고 점차 복잡한 형태로 엮어 나간다. 중심에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거푸집을 쳐 나가다가 원주의 바깥쯤 되는 곳에서 방향을 바꾸며 이번에는 입으로 거푸집을 먹으며 안쪽으로 날실을 쳤다. 거미가 행하는 자원의 재활용이며 건축 기법이다. 거미는 상대적으로 작은 두뇌를 가졌지만 훌륭한 집을 짓는다. 구조와 형태가 달라도 규칙은 동일하다고 한다. 구간마다 무결성을 점검하고 다음에 단계로 이동하는 거미에게 지혜를 배워야 하겠다.
거미가 남을 속이는 것 같아도 배운 건 이것밖에 없다. 오히려 욕심과 탐심으로 남을 속이려는 인간이 더 나쁘다. "무고히 낚였다고 생각하지도 마라! 무법하게 선을 넘은 너희가 바로 내 밥이다!"라고, 말할 것 같다.
같은 무게의 강철보다 20배나 높은 거미줄을 대량생산을 할 수 없다. 누에와 달리 거미는 서로 잡아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미줄의 유전자를 염소의 젖샘 단백질에 합성하여 유사 거미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거미줄 견사는 열에 강하고 가볍고 질겨서 신발과 방탄복 등에 활용되고 있으며, 순정 거미줄은 인체의 신경망을 잇는 복잡한 수술에서 재생 가이드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인체에 무해한 천연 소재로서 혈액순환개선제와 소화제 및 발기부전 치료제 등이 개발 중이라고 전한다.
이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도전의 길을 끝없이 열어주고 있다. 골몰하던 손을 멈추고 거미처럼 잠시 명상에 잠겨보자!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이 내 속에서 고요하게 흐를지도 모를 일이다. 무안 공항의 제주항공 기장이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음같이 내 일을 붙잡고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나도 허공에 줄을 던지는 거미처럼 내일을 향해 힘껏 로프를 던져 올리자!
* 파이스토스 원반: 1908년 크레타섬 궁전 유적에서 발견, 사용 목적과 의미는 현재까지 미스터리로 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