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황영원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면 한낮의 분분했던 그 무엇들이 조용히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비단 먼지뿐 아니라 우리의 몸도 규칙적인 긴장과 스트레스로 일몰 시각에 맞추어 조금씩 감각은 둔해지고 힘에 부친다. 몇 해 전 여름휴가 때 아내와 한라산 윗세오름 등반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 기사는 “아름다운 낙조를 보고 싶으면 가까운 모슬포항으로 모시겠다”라고 말했다. 아침에 등산화 끈을 묶으면서 하산하여 몇 군데 명소를 더 둘러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이미 무거워진 다리로 모슬포의 비경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했다.
일몰의 명소는 굳이 모슬포가 아니더라도 전망 탁 트인 곳이면 어디든 좋다. 그중에도 비가 그친 오후에 만들어내는 저녁노을은 더욱 선명하다. 이런 날 서해안 어디쯤이나 강변 어디에서 맞이하는 낙조는 데칼코마니에 찍힌 횃불처럼 강렬한 전율을 일으킬 것이다. 자연이 빚어내는 거대한 반전 앞에 언제나 경외심을 맛본다. 간혹 음악회 객석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처럼 숭고한 분위기에 심장이 멎을 듯 나도 몰래 눈물이 솟구친다.
노을은 햇빛이 대기층을 통과할 때 만들어지는 프리즘 효과다. 지구의 중력이 대기를 끌어당겨 지면에 가까울수록 밀도는 높아져서 통과하는 태양 빛의 파장이 짧은 청색 계열은 산란하고 긴 파장의 붉은 빛이 투과하여 멋진 노을을 만들어 낸다. 빛이나 색깔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도 불타는 노을을 보면 탄성을 지른다.
뭉크는 붉게 물든 하늘 배경에 등장인물의 일그러진 표정에서 극도의 두려움을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 <절규>는 자신의 어릴 적 받은 트라우마와 불안한 정서가 만들어낸 걸작이라 말하기도 한다. 같은 사물을 보고도 관찰자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리트머스처럼 다른 해석을 낸다는 것이 신기하다.
삼국유사에서 수로왕의 부인 허왕후는 인도에서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왔다고 전한다. 낯선 타국에서 겪는 향수와 외로움에 위안을 주는 것은 고국의 하늘과 이어주는 노을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도 경남 김해의 분산성에서 바라보는 장엄한 노을을 ‘왕후의 노을’이라 부른다. 나라의 건국이나 패망처럼 국운이 걸린 시기의 권력 나팔수들에게는 하늘의 기이하고 상서로운 징조는 마치 대통령 취임식장에 뜬 무지개만큼 좋은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구름이 보여주는 많은 형상 가운데 어떤 사물과 겹치는 실루엣에서 예사로이 넘기지 않으며 의미를 찾기도 한다. 시야를 단번에 뒤엎는 노을이나 찬연히 뜬 달과 비 끝에 생기는 무지개를 보면서 감탄한다. 그리고 오로라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 과분한 비용을 치르면서까지 극지방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우리의 감성과 달리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섭리를 밝히려 끝없이 노력하는데 예술이나 종교도 과학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주중에 1박2일 여행은 쉽지 않으나 회색 건물로 둘러 막혔던 도심을 벗어나 푸릇한 산야를 만난다는 것은 책갈피에 끼워놓고 잊어버렸던 지폐를 찾은 듯 달콤하다. 무채색의 지루함을 던져버리니 긴장되었던 어깨 근육이 풀리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 연두색 나뭇가지들과 함께 내 마음도 미풍에 흔들린다. 만개한 벚꽃은 터널이 되어 마주 보는 얼굴이 환하다. 아무 슬픔도 없는 저들의 미소를 보면서 나도 연이틀 저렇게 흐드러지게 웃어보고 싶었다.
숙소에서 자리를 펴면서 보았던 이불에는 예쁜 꽃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고, 덮을 때 세제의 향기가 났다. 그러나 늦은 오후에 마신 원두커피의 탓인지 눈을 감아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고 시간이 자정 훨씬 넘어가자 점점 걱정과 조바심이 밀려왔다. 누울 때 느꼈던 그 향기와 부드러운 감촉은 간데없고, 오히려 자수의 실밥과 솔기의 재봉선마저 살결에 닿으며 심기를 건드리고 가슴에 올려놓은 팔도 무거웠다. 오호라! 메뚜기도 짐이 되는 날이 오면 우리의 마지막 순간도 이러할까....
전쟁의 폐허나 방사능 오염 지역에 쓰러진 빈 건물과 아무렇게나 놓인 잔해 사이에 가냘프게 피어난 꽃을 잡지에서 본 적이 있다. 인간의 간섭에서 벗어났을 때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는 걸까.
우리는 중력을 의지하며 땅에 발을 붙이고 산다. 비행기나 자기부상 열차도 예외가 아니다. 저들도 낙엽이나 물처럼 언젠가는 중력 앞에서 말없이 낮아지게 될 것이다. 우주 행성들이 충돌이 없이 자기 궤도를 지키며 밀물과 썰물로 바다가 숨 쉬는 것도 모두 엄청난 힘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중력은 공간을 제멋대로 떠돌며 어지럽히는 무질서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낮은 곳에 있는 바다가 더욱 위태로워 보인다. 생명의 보고인 바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중력의 속성 때문에 쓰레기로 채워질 수 있다.
인생이나 건축물도 균형이 잡혀야 장수한다. 우리의 육신과 건축물도 기울어지면 무너진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은 석재의 균형미를 뽐내며 서 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목조 건축물이나 안정된 자세로 천년 풍화에 견디고 서 있다.
나는 통닭을 먹을 때마다 다리뼈 옆에 붙은 가느다란 비골을 뽑아내며 내 종아리를 가끔 만져본다. 대부분의 걸어 다니는 척추동물에는 다리 근육을 지탱하는 비골이 있다. 체중을 지탱하는 경골만으로는 안전 보행이 어려워서 마치 비골을 나중에 덧대어 놓은 것 같다. 개와 고양이는 물론 공룡까지 비골이 있는데 열심히 찾아봐도 소에게는 없었다. 그의 우직한 성품 때문인지 아니면 비골이 없어서 천천히 걷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여자가 비골이 없으면 하이힐은 절대 신을 수 없을 것 같다.
선진들이 탐구해 놓은 진리 위에 인류의 문명은 전수되고 발전한다. 보석과 같은 지식을 대물림하며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 우리 정치인들도 이제는 코미디 같은 거짓말을 버리고 정직했으면 좋겠다. 정제되지 못한 날카로운 언어가 상처를 남긴다. 권력도 중력처럼 사필귀정 바른 곳으로 돌아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비골처럼 귀하게 쓰임 받는 위정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진리에서 중력을 느껴보자.
인생은 유한하며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구의 중력권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을 지탱하고 구속하는 중력은 과연 무엇인가? 낙석처럼 추락하지 않도록 붙잡아야 할 것을 꼭 붙잡고, 세상의 탁류에 미끄러지지 말 일이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위로 벚꽃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나 나는 아직 떨어질 때가 아니다. 바람을 거슬러 치솟는 독수리처럼 다시 한번 날개를 치며 힘차게 날아오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