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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학/수 필

칠게(七蟹)

by 山海鏡 2024. 10. 1.

칠게 (七蟹)

              황영원

 

  날 저문 개펄에는 조용한 향연이 펼쳐진다. 낙지나 고동, 짱뚱어도 많지만 대부분 칠게의 무리다. 개펄에 굴을 파고 살면서 썰물 때 밖으로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4~6월 번식기에 수컷들은 집게발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멋진 집게춤을 추면서 구애를 시작한다. 뛰어난 시각으로 위협을 느끼면 재빠르게 숨는데 훼방꾼이 사라진 어둑한 개펄의 산책은 저들만 누리는 여유와 특권일지도 모른다.

 

  남도의 갯마을 사람들에게 칠게 사랑은 유별나서 이름만큼이나 많은 요리 비법이 전해 온다. 튀겨 먹고, 무쳐 먹고, 빻아서 비벼 먹고, 담가서 묵혀 먹고...., 그들은 '칠게' 소리만 들어도 고소한 식감과 바다의 풍미가 침샘을 자극할 것 같다. 그들에게 게의 이름을 왜 칠게로 부르는지 물어보면 ‘칠칠찮게 온몸에 뻘을 묻혀서~’, ‘흔해 빠져서~’, ‘등딱지가 까매서~’, ‘칠월에 가장 맛나서~’ 칠게라 부른다고 한다. 풍요로운 요즘은 추억을 부르는 특별한 간식거리지만, 흉년이 들어 굶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했던 시절에는 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게들은 참게, 대게, 꽃게, 털게, 도둑게, 방게, 농게 등,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이름자 앞에 붙인 접두어 칠(七)이 궁금하다. 칠은 동서고금이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다. 우리는 칠월칠석, 칠갑산, 칠보산, 북두칠성 등으로 구별하여 쓰고 있으며, 성경 창세기는 다섯째 날 '기뻤더라'와 여섯째 날 '심히 기뻤더라' 다음에 오는 '안식일'이 이렛날이다. 우리는 이미 일주일이라는 복된 리듬 속에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칠게의 이름에도 우리 삶과 연관된 끈끈한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칠게를 잡는 건간망은 갯벌에 막대기를 꽂아 고정하여 게가 갯벌에서 나와 자연스럽게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그물코를 조절하여 새끼들은 잡지 않는다. 반면 PVC 관을 반으로 잘라서 만든 홈통 어구는 미세 플라스틱을 배출하며, 어린 것들까지 잡아들이는데 그야말로 씨를 말리는 무자비한 불법 어구다. 칠게는 유기물 분해뿐 아니라 굴을 파서 다른 생물도 숨 쉬도록 도움을 주는 이로운 생물이다. 특히 멸종 위기의 철새들의 먹잇감이 되므로 개체수가 많을수록 생태계는 건강하다고 전한다.

 

  칠게가 거친 파도와 포식자 사이에서 생존하려고 전신 갑주와 창검을 갖추었다. 그러나 마도요나 저어새의 긴 부리나 주걱 앞에서 갑각과 집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천적을 피할 수 없을 때의 선택은 어쩌면 거룩한 헌신뿐일 것 같다. 우리는 깁스한 안쪽이 가려워도 긁을 수 있지만 칠게를 보면 참으로 딱하다. 팔을 뒤로 젖힐 수도 없고 탈피로 물컹해진 알몸은 포식자 눈길에서 재빠르게 피해야 살 수 있다.

 

  진도 덕병마을의 충제(蟲祭)는 해충 퇴치와 더불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유의 민속 행사다. 벌레를 없애달라고 기원하면서도 종자는 남겨달라는 축문의 구절 '절멸후유종'(絶滅後遺種)에서 미소가 절로 번진다.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요즘 정치는 외눈박이 괴물 같다. 성직자로 위장한 야바위꾼과 덫에 걸려 홈통에 미끄러진 칠게의 신세도 안타깝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 사람도 한심하다. 우리는 진도의 충제에서 깊은 의미를 곰곰이 새겨볼 일이다.

 

  요양병원으로 모시기 전 어느 가을에 장모님께서 밖을 바라보시며 혼잣말로 "볕이 아깝다!"라고 하셨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 여적 가을볕이 반갑고 시피 버려짐이 아까우신 게다. 이런 말씀은 골수에서 배어 나오는 삶의 연대기가 아닐까. 우리나라의 욕도 음식 문화를 닮는 것인지, 늘 쓰는 말 속에 저런 오살 헐! 쌔려 죽일! 쳐 죽일! 이런 말들은 칠게의 조리 과정에서 찧고 치대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에 두 번씩 들고 나는 물때를 맞추는 삶의 애환 속에 질펀해 보이는 진도아리랑도 풍류를 더한 젓갈처럼 차지고 맛깔나다.

 

  동해안의 명물 오징어와 명태는 정말 북극해로 떠나버렸을까? 예전 성어기에는 생선 수레와 사람과 돈이 뒤범벅되어 장화로 생선을 밟고 다니던 진풍경은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남획이나 오염보다 수온의 상승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얼마 전 IPCC는 '지구 온도가 2℃ 상승하면 생물의 약 18%가 멸종한다'라고 발표했다. 태양광 셀과 아스팔트는 검은색 계열이라 태양열을 다량 흡수하고, 풍력과 조력발전도 대기와 해류의 순환을 방해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에너지가 많을수록 지구는 열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더 큰 태풍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무심코 사용하는 일회용 컵, 함부로 구겨 버리는 한장의 종이와 생각 없이 누르는 전원 버튼도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면서 잠시 생각해 볼 일이다. 종이는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를 만들고 동물을 키워내는 삼림과 자연을 파괴하여 얻어진 소중한 자원이다. 잠깐의 편리를 위해 쓰고 버린 것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상 기온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한꺼번에 멈출 순 없겠지만, 내 주변부터 실천하다 보면 환경운동 동참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극심했던 올여름 더위를 생각하면 내일이 더 걱정스럽다. 해마다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비책은 없는 것일까? 미래 세대에 물려줄 터전을 위해 우리 모두의 지혜와 슬기를 모아보자!

 

  황혼의 개펄에도 무더운 바람이 불어온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칠게들이 한꺼번에 '주여!' 외치는 것 같다. 무질서의 인간들이 모두 사라지면 천국의 문이 열리기 시작할까? 백두대간의 늑골을 타고 내려온 더운 육수가 내륙을 돌아 바다로 흘러든다. 파도에 부서지는 형형한 달빛에 칠게의 자루 눈이 촉촉하다.

 

* IPCC: 세계기상기구(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에 의해 1988년에 설립,

인간 활동에 대한 기후 변화의 위험을 평가하는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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